번역을 결심한 후 기존의 영어 번역과 일본어 번역을 비롯한 여타 번역본들을 살펴본 결과, 한국어 번역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팔천송반야경』을 최초로 번역한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78)의 영역본을 참고하면서 번역상의 오류를 많이 발견했고, 문장이 여러 번 반복된다는 이유로 상당한 양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자의 결과물이 이러면 후학자들의 연구는 더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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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을 인지할 때, 산스크리트 『팔천송반야경』을 번역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헌 연구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기존 번역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그 결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어 『팔천송반야경』이 나온다면 매우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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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 『팔천송반야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진행하면서 끝없는 사막을 걷고 있거나, 미로에 빠져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전공이 언어학인지라 불교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역자가 경전 번역을 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산스크리트라는 언어를 안다고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경전이 담고 있는 심오한 의미를 번역하는 데 필요한 일차적 열쇠는 바로 산스크리트라는 언어를 운용시키는 문법 원리의 올바른 이해에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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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번역과 일본어 번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각 장에 주제가 달라질 때마다 독자들이 중간에 쉬어갈 수 있도록 소제목을 첨부했다.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내용에 집중하고 이해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다만 짧은 분량인 29장과 32장, 그리고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30장과 31장은 예외로 두고 소제목을 달지 않았다. 『팔천송반야경』의 핵심적 개념과 용어, 그리고 전체적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은 1장 ‘모든 양상의 불지에 대한 수행’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무엇보다도 1장을 제대로 숙지하여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를 권고한다. 만약 1장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나는 30장 ‘상제 보살’과 31장 ‘법상 보살’을 먼저 읽어보고 다시 1장으로 돌아오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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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팔천송반야경』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집중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승경전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정도로 오래된 것일까? 현존하는 산스크리트 사본들의 원형이 되는 것은 대체로 기원전 100년과 기원후 100년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본이 원형에 가깝고, 그 성립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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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본의 명칭, 즉 경의 이름은 처음부터 『팔천송반야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간다리어로 된 자작껍질 사본들에도 “a??as?hasrik?(팔천)”에 대응하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쇼펜(Schopen, 2000, 1-30)에 따르면 이 8,000이란 수사가 붙는 경전 이름의 비문(碑文)이나 사본들은 11~12세기경 팔라(P?la) 왕조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한다. 한역 자료들에서도 게송(偈頌)에 따른 구분은 당대(唐代)의 현장(玄?) 이후인 7세기부터 나오고 있다. 따라서 정확히 언제부터 ‘8천’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는 비교적 후대에 와서 명기되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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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가라시마(2013)는 누락된 그 부분을 찾으려 노력했고, 마침내 네팔 등지에서 수집하여 구축한 ‘남아시아 산스크리트 사본 데이터베이스’(No.47, 주 17참조)를 통해 재구성해내기에 이른다. 그에 의해 복구된 이 부분은 현재 바이댜의 『팔천송반야경』에 삽입되어 GRETIL(주 3참조)을 통해 공개되었다. 본 번역(28장)에 그가 재구성한 부분을 반영했고, 그 위치는 일러두기에 표시해 두었다. 재구성된 텍스트는 전체 분량에서 볼 때 매우 적은 양이지만, 누락된 부분을 찾아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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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되도록 삭제하지 않고 범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번역을 시작하고, 초반에 이러한 표현들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고, 영어 번역이나 일본어 번역처럼 어떤 방식이든 누락의 처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번역이 중반을 넘어 종반에 접어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범본 『팔천송반야경』에는 ‘반야바라밀다(Prajn?p?ramit?)’가 1,300여 회 언급되고 있다. 한두 번만 보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열 번, 스무 번, 그 이상 반복되어 눈에 들어오게 되니 글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인가 더 절실해지고 해당 개념이 더 분명해진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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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저 자신은 실로 보살의 명칭이나 반야바라밀다를 알지도 인식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이렇듯〕 보살의 명칭이나 반야바라밀다를 찾지도 인식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제가 〔도대체〕 어떤 보살을 어떠한 반야바라밀다로 교화(敎化)하고 교도(敎導)해야 할까요? 실로 걱정〔되는 상황〕은 보살의 실체를 알지도 인식하지도 바라보지도 못하는 제가 보살이라는 명칭에만 기대어 〔긍정이나 부정 등의〕 생멸(生滅)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 pp.34~35
“사리자야, 법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이니라. 그렇기에 이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찾아지지 않는〕 법들은 무명(無明)이라 불리느니라. 배우지 못한 범부(凡夫)와 일반 중생이 법들에 집착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모든 법을 세우고, 세운 후에는 두 개의 극단(極端)에 사로잡혀, 그 법들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느니라….”
--- p.44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선서이시여,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전지자성으로 회향하여 선근들을 성숙시키는 그러한 반야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극도(極度)로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네가 말한 극도로 인해 반야가 〔극도, 즉〕 바라밀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반야로 인해 전지자성으로 회향된 선근들이 바라밀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아난다야, 전지자성으로 회향된 선근들로 인해 반야바라밀다는 나머지 다섯 개의 바라밀다들보다 앞서며, 이들을 안내하고 이끄는 것이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다섯 개의 바라밀다는 반야바라밀다에 포함되며,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6바라밀다 모두를 포함한 명칭이니라. 아난다야, 그렇기에 반야바라밀다를 부르는 것은 여섯 개의 모든 바라밀다를 부르는 것이 되느니라….”
---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