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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336g | 140*195*20mm
ISBN13 9791168670525
ISBN10 116867052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어릴 적 나는 우주에서 바라보면 내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보잘것없는 나라서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믿는 나는 아주 소심한 아이였다. 지금은 안다. 사실 나는 광활한 우주 속 먼지조차 될 수 없다는 걸.

그렇다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 누구라 불리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스쳐가든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살아가는 데 어떤 의미이면 뭐 어떠랴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먼지로라도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어진 내 삶이 허락되는 그 모든 시간을 나는 그저 뚜벅뚜벅 걸어왔고 걸어가게 될 뿐인 걸. 그래서 이 소설집을 쓰는 내내 나는 기억과 시간에 잘 조련된 글자들을 기꺼이 찾아다녔다.

내 모든 감각이 아직 꿈틀거리며 살아있음에 너와 나를 이해하는 그리고 위로하는 작은 상상력이 혈관을 따라 이동하고 있기를 바라니 글자들은 악다구니로 손가락 마디마디로 기어 올라왔다. 기절하지 않고 버티며 글자들을 혼신으로 엮어내 온 모든 날들, 그 몇 년을 견뎌온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 눈과 내 몸에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전해본다.
---「프롤로그」중에서

어느새 아파트를 벗어나 도로로 나온 너는 고개를 숙이고 주위를 살핀다. 살짝 금빛 브리지를 넣은 너의 머릿결이 하얀 차의 헤드라이트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손을 뻗는다. 빗물에 뭉개진 껌 한 통을 든다. 신기하게도 거기에 아직 껌이 있었다.
--- p.55

누군가의 기억을 사야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는 요즘 손을 씻는 일에서 그치지 못하고 어느 때부터인가 귀를 씻기 시작했다. 때때로 염증 때문에 김 박사에게 들러 치료까지 받은 적도 있지만 그 후로도 나는 귀를 씻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섞여드는 소음이 온몸을 타고 적시다 귀를 통해 터져 나오는 꿈을 악몽처럼 반복하며 꾸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말할 순 없지만 그들을 만나고 나면 나는 밤마다 온몸이 가려웠다.
--- p.78

나는 뒷모습만 남은 그 여인, 그 할머니의 사진에 손가락을 대고 삭제버튼을 누른다. 이제 그들을 보내줘야 할 시간인 것 같다. 이른 하오로 기억된 그들의 시간이 아니라 정오를 넘기며 시작될 나의 시간으로 가기 위해 지금껏 블루를 닮았던 나의 시간은 이제 잘 길들여진 가죽으로 가공될 일만 남았다.
--- p.127

투명한 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아무것도 약속되지 않은 나의 느낌 따라 흘러가는 때. 시곗바늘이 정하지 않은 나의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바로 이 순간. 내가 너의 작은 손이 되고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도 되는, 젖은 행주처럼 바람을 따라 휘 흘러버리는 순간. 이제는 그 순간조차 버거운 나는 2인용 식탁 위에 남겨진 가위를 바라만 본다.
--- p.142

“이건 규칙에 맞지 않아. 언제나 나는 사랑받을 때 잠들어야 하고 아홉 시가 넘으면 안 되는 거야. 아버지는 돌아와야 하고, 나는 저녁을 먹어야 했어. 이건 규칙에 맞지 않아. 완벽한 하루는 이런 게 아냐.”
--- p.186

나는 마지막 남은 아버지의 규칙을 되돌리려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나의 몸은 그리고 또 하나의 나, 어린 선의 몸도 사선으로 빗금을 치며 조각조각 사라져간다. 조용히 돌아서는 그의 뒤를 붙잡고 발버둥을 치지만 우리의 몸은 어느새 조각조각 낮게 더 낮게 내려앉고 그에게 서서히 흡수되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는 그가 태양이나 밝은 빛 아래 있을 때만 존재하는 그의 그림자였던 것처럼.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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