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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 불에 서로의 영혼을 그을리며

걷는사람 시인선-07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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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50g | 125*200*20mm
ISBN13 9791192333342
ISBN10 119233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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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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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집을 비운다
식탁 위에 밤을 차려 두었으니
먹히지 말아라
---「사주」중에서

날짜를 세는 일은 나의 새로운 습관이에요 카운트다운은 세탁기를 돌릴 때나 하는 줄 알았어요 우리가 깨끗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세제가 눈처럼 휘날리면 악몽에도 달콤한 향기가 필요해요 어젯밤 꿈에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세탁기에 갇혔어요 눈을 떴을 때 나는 증오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었지요 누군가 장래희망을 묻는다면 엄지손가락으로 개미를 눌러 죽일지도 몰라요 장래에 때밀이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식물을 구석구석 닦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나는 때밀이가 되지 못해 계약직이 되었어요 쿨하게 이별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약속한 횟수만큼 돌아 버립니다 날짜를 빠르게 세기 시작해요 만족합니까? 기대에 부응합니까? 날짜를 세다가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일상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날이 오면 정말 이별입니까 잘 먹고 잘 살고 안녕히 모두 안녕히 하나의 이벤트가 끝납니다 나는 여전히 빈손입니다
---「타협」중에서

성장하는 일이 지루합니다
선택하고 싶지 않은 일만 선택하면서
이해한다는 말로 오해하면서

집에 우환이 있냐고 묻지 마세요
집안 곳곳에 엑스를 표시했으니
불행이 지나간 자리는 밟지 마세요

울 때 소리 내지 말자
이것이 우리 집 가훈입니다
농담처럼 절망하는 것이
집안 내력입니다
---「진학 상담」중에서

지독한 안개가 계속되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는 파도가 치지 않았고 사람들은 밤이 오류를 일으켰다고 수군거렸다 모래가 눈 안에 가득해서 나는 애인의 얼굴을 아직도 보지 못했다 조개들이 쌓여서 무덤 띠를 이루었고 선을 넘지 말라는 방송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반대편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개 속에서 애인과 손을 잡을 때마다 맨홀 속으로 맨손을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밤마다 침대 위에 누워 함께 침몰했다 잠결에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따뜻한 밤이 입과 귀로 흘러들었다 모래가 씻긴 애인의 얼굴은 해변으로 떠밀려 온 시신과 닮았다 웃을 때마다 차가워지거나 일그러졌다
---「청춘 콜라주」중에서

방어가 목적이라면 장미꽃과 가시는 왜 어울리는지
운명에 맡긴다면 왜 총알은 하나만 넣는지
성장하면서 죽어 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름다워지는 서로를 지켜보는 일은 드물고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피부에 새겨 두었지만
누군가 갑자기 아프면 견딜 수가 없다

(…)

바닥에 던져진 주사위가 선택을 거부한다
공백이 되었다가 아무 숫자나 고른다
거짓말 속에 원하는 예언이 들린다
---「직관」중에서

울음은 가장 커다란 죄악이니

매일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질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아갈 것

이곳에서 사랑은 언제나 개미지옥
부정하지 말 것
---「이별의 해부학」중에서

한 가닥을 당기면 죄다 풀려 버리는 스웨터처럼
슬픔으로 잘 짜인 사회
나는 주기적으로 주변을 자른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기도 했었는데

손짓하면 내 곁에 왔다가
고속으로 멀어지는 수많은 타인들

우리는 보호색을 하고 있다가
서로를 잡아먹는다

배부른 자들의 손으로
도시는 완성된다
---「서울」중에서

아직도 생강과 생각의 차이는 모르지만
그것이 슬픔이 나를 먹는 이유는 아니다

한밤중에 빗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면
개를 보러 전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입이 없어서 말은 못하고
슬픔이 나를 다 먹을 때까지
---「전생 체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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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보람의 시는 불신한다. 연인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축축하거나 빽빽한 풍경과 거기에서 오는 감각이 있을 뿐이다. 믿지 않기에 감각만을 남기며 감각만이 남았기에 이 불신은 아름다움으로 기록된다. 상처를 믿지 않고 고통의 감각만을 느낀다면, 애초에 상처가 없던 것처럼 상처를 지울 수 있다. 불행을 믿지 않고 이질감만을 느낀다면 불행을 삭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각은 순수한 것, 감각은 용기 있는 것. 순수와 용기에서는 가능성이 태어난다. 그러한 가능성으로 원보람은 쓴다. “미래를 예언하는 건 일종의 자만”이라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를 권리가 있다”고. “날아오는 새를 삼”키는 “보호색”을 띤 “고층 빌딩”들의 세상, “슬픔으로 잘 짜”인 “사회”인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주변을 자”르며 살아가고 있다고. “정신 승리를 거듭하다가 몸은 패배하는 우리들”이 느껴야 하는 것은 고통과 두려움이 아니라 “나무 아래”에서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감각뿐이라고.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촉각을 통해 우리는 “잠시 동안 혼자가 아”닐 수 있다고. 연민도 자기 비하도 아닌 딱 그만큼의 감각으로, 원보람의 시는 있다. 담백하고 단단하게 존재하고 있다
- 강지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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