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벨뷰 병원에서 소외된 이들을 치료해온 의사 다니엘 오프리,
그녀가 전하는 의사의 감정과 치료의 관계에 관한 생생한 에세이
“의료현장의 여러 문제들 뒤에 감정이 숨어 있다”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자 뉴욕 벨뷰(Bellevue) 병원 내과 의사인 다니엘 오프리가 쓴 의사의 감정적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그 감정이 의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에세이. 벨뷰 병원은 뉴욕의 저소득층 주민들이 정부 지원 보험을 이용하여 치료받는 공립병원이다. 다니엘 오프리는 이 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며 소외된 사람들과 위기에 처한 환자들을 돌보아왔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업무, 애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치료한 환자의 죽음과 고통, 환자와 그 가족의 의료에 대한 불신, 자신의 판단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의사에게 감정적 고통을 안긴다. 그리고 의사의 감정적 고통은 다시 환자의 치료에 영향을 끼친다. 적극적으로 수술하고 투약해야 할 상황에서조차 조심스럽고 소극적인 치료를 택하거나, 환자와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기 위해 고통에 대한 공감마저 철회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 책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람의 절망, 두려움, 고통, 자책과 환멸의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 했던 상황에서 겪었던 두려움과 모욕, 심장이식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환자를 바라보며 느낀 슬픔과 좌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죽어가는 신생아의 모습을 처연히 바라보아야 했던 인턴 의사의 슬픔, 짓누르는 업무와 삶으로 인해 좌절감에 빠진 채 알코올에 중독되어간 의사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러나 의사의 삶 속에 두려움이나 슬픔, 좌절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하거나, 환자들이 질병을 극복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보람과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다니엘 오프리는 이 모든 것들이 의사의 감정과 의료행위에 명백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의사를 향한 환자의 감정, 환자들 돌보는 의사의 감정, 의료의 밑바탕에 깔린 두 감정을 파악하고 처리하는 일이야말로 검진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의사와 환자 모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검진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의사와 환자
첨단 의료기기들이 환자의 치료를 위해 도입되고 있으며,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효율적인 의료가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최신식 의료기기가 도입되고 정교한 의료기술이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다고 해도, 의료는 기본은 의사와 환자, 두 사람의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의 핵심은 공감이며, 의학에서도 필수적이다.
다니엘 오프리는 어느 약물중독자의 사례를 통해 의사와 환자의 공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근무하던 벨뷰 병원은 뉴욕의 저소득층 주민이 많이 찾는 시립병원이다. 환자들 중에는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의사들은 그들의 반복적인 입원과 퇴원을 바라보며 허무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존 카렐로라는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약물중독과 금단증상으로 병원을 수없이 드나들던 환자였다.
어느 날 그녀는 수련의들을 데리고 교육회진을 하면서 그를 집중 인터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환자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게 된 순간을 마주치게 된다. 평범했던 노동자가 마약에 중독되던 순간을 회상하는 동안, 그녀와 수련의들은 그가 마약에 빠져가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가 겪었을 인생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카렐로 씨, 아주 오랫동안 약을 해왔다고 알고 있는데요. 정확히 언제쯤 자신이 중독되었다고 느꼈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 그러니까 카렐로 씨, 우리를 거기로 데려다 주시겠어요? 당신이 중독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말이에요.”
난 사실 이게 제대로 된 질문인지도 확신이 없었다. … 그렇지만 나는 질문을 공중에 띄운 채로 놔두었고,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질문을 곱씹었다.
“그래요. 정확히 어떤 순간이 있긴 있었어요. 4월 초였어요. 헨리 허드슨 파크웨이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어요. … 동생이 조카 생일에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나를 초대했어요. … 그런데 바로 그 때, 약이 딱 필요해진 겁니다. … 그땐 정말이지 내 동생을 보는 것보다, 어린 조카를 보는 것보다 약이 더 간절했어요. … 웨스트 158번가에서 차를 돌렸어요. 남쪽으로 방향을 튼 순간 내가 중독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 그 뒤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어요.”
이후로 그녀의 팀원들은 더 이상 그 환자에 대해 허무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지 않게 되었고, 병실을 방문하거나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더 많아졌다. 환자 역시 의사들이 정성껏 돌보고 있음을 느끼는 듯했고, 치료에 더욱 협조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생사가 걸린 일의 두려움과 공포
사람의 생사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이 내린 판단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의사를 엄습한다. 의사라는 직업은 두려움의 크기가 남다르다. 어떤 일이든 직업적인 두려움은 있다. 잘못 투자해서 돈을 다 날릴 수도 있고, 가족을 실망시킬 수도 있고, 회사에 손해를 끼치거나 직장 상사의 눈밖에 날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다른 직업과 그 크기를 비교하기 어렵다.
밤낮없이 위기에 처한 환자들이 병원으로 온다. 그리고 의사는 수많은 의학적 의사결정의 상황에 노출된다. 순간의 판단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의사의 판단과 처치는 그만큼 치명적이다.
여러 가지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의 경우, 그 증상들 속에 다른 심각한 질병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다니엘 오프리는 병든 노모를 간호하면서 직장일과 집안일로 힘들어하던 중년의 여성 환자가 스트레스와 불안, 투통과 복통, 이명, 숨 가쁨, 가슴 통증, 현기증 호소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환자에게 심전도와 심장 부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서 증상을 완화하는 방법을 제안하지만, 며칠 뒤 환자는 급성 폐색전으로 응급실로 실려 오게 된다. 삶을 옥죄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복합적인 증상들이 나타났다고 판단했는데, 그 증상들 속에 폐색전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이 숨어 있었다.
오프리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걱정이 많은 환자’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치명적인 질병이 숨어 있을 가능성을 놓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었다. 환자는 양쪽 폐에 모두 문제가 생겨버렸고, 평생 혈전용해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프리는 환자에게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자신이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환자는 의사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했다. 의사가 환자의 처지를 공감했기 때문에 진실한 사과가 가능했고, 환자가 의사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했다.
이밖에도 의식을 잃은 환자 앞에서 당황하며 자신감을 잃고 두려워했던 순간, 정신과에서 돌봐야할 자살 기도 환자를 병원 밖으로 내보낸 뒤 전전긍긍하며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때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멈추지 않는 슬픔과 좌절 그리고 희망
병원은 고통 받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환자가 죽거나,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었을 때, 의사 역시 고통과 슬픔에 휩싸이게 된다. 암을 치료하는 종양내과 의사의 경우,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 환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슬픔이 삶 구석구석까지 배어든다. 그들에게 슬픔은 일상이 되고, 개인적인 삶에까지 흘러들고, 내면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그리고 슬픔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환자와 정서적 유대를 철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책에는 죽어가는 신생아를 품에 안고 슬퍼하는 인턴 의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부모의 품에 안겨보지도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죽어간 아기, 간신히 살려냈지만 뇌사에 빠져 식물 상태가 된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연히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의사들 중에는 슬픔으로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환자와 감정적 유대를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슬픔은 의료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질병과 죽음은 의료의 일부분이고 그것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의사는 처방전을 발급하는 로봇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환자의 고통과 죽음, 압도적인 업무량,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없는 어려움, 생명을 손에 쥔 두려움, 예기치 않은 의료소송까지 의사로 살아가는 일은 심한 스트레스와 육체적, 정신적 압박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견딜 수 없는 힘든 상황으로 인해 번아웃에 시달리거나 의사라는 직업 자체에 회의와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오프리는 의료소송 직전까지 갔던 환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환자와 깊이 의논한 끝에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하고 동의서를 작성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에 가족들로부터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의를 받게 되고 변호사에게 추궁을 당하는 상황을 겪으며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과 좌절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의사들이 견지해야 할 자세와 의료기술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왔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의사의 감정에 대해서는 지금껏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오프리는 이 책에서 의사의 삶속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두려움과 분노, 공감과 애정, 희망과 절망의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의료를 위한 길을 모색한다. 의사의 감정은 환자의 치료에 명백한 영향을 미친다. 의사와 환자가 느끼는 감정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은 의심과 냉소가 뒤섞여 있는 의학의 그늘에 햇볕을 비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검진테이블의 양쪽, 의사와 환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