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하는 사람과 가야 할 곳에 집중하느라, 웬 여자가 다리를 절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자.
저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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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니 건물 입구의 불빛이 새까만 밤하늘에 박힌 작은 별처럼 멀리서 반짝이고 있었고, 손을 더듬으니 바닥에 고인 물이 찰박거렸다. 네모반듯한 통로는 거대한 지하 미궁 같았다. 빙글빙글 돌다가 같은 곳을 몇 번이나 지나치기도 했다. 서울 전체를 지하로 뒤집어놓은 듯 커다란 공간은 끝없이 복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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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개미굴처럼 불규칙하게 구불구불 펼쳐져 있었다. 기어가야 할 만큼 좁은 통로도 있었고, 차 한 대는 거뜬히 지나갈 만큼 넓은 곳도 있었다. 통로 여기저기 움푹하게 파여 마치 방처럼 아늑한 공간도 있었다. 악취도, 추위도 덜했다. 손으로 벽을 쓸자 부드럽게 손자국이 났다. 소리도 흙이 먹어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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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복작대는 소음과 불빛 대신, 정적과 어둠이 차분히 스며들었다. 정체된 지하의 공기는 물에 풀어놓은 물감처럼 서서히 체온을 낮추고, 시야를 어둡게 하고, 맥박을 늦추고, 숨결을 부드럽게 걸러줬다. 치열하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죽음과도 같은 시간. 강바닥으로 끝없이 가라앉아 조용히 자리 잡은 침전물처럼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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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름 좋지 않냐? 배산임수. 저어기, 산.” / 어르신이 손가락으로 높이 쌓인 돌무더기를 가리켰다. / “그리고 저어 아래, 물.” / 이번에는 반대쪽 벽의 입구 너머 저수지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 “명당도 이런 명당이 어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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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땅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에 비하면 몸이 아픈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절망은 오늘의 노력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그 노력이 일말의 희망조차 불러올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왔다. 나는 절망했었다. 하지만 지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예 달리기를 포기했으니까.
--- p.47
"뭐, 손볼 데가 많긴 하지만 이만한 곳도 없지. 사람들도 괜찮은 것 같고. 물이 있는 게 제일 좋고.” / “뭐, 다 그래봤자다. 어차피 우리가 떠나온 데처럼 사람들 모이면 싸움 나고 치고받고 하는 거지. 특히 여기 아래로 내려온 인간들은…… 글쎄. 위에서도 제대로 못 사는데 아래에서라고 제대로 살 리가.” / 표 교수는 마치 자신은 지하에 내려온 사람이 아닌 것처럼 혀를 차며 한오가 사다리를 노끈으로 단단히 고정하는 것을 바라봤다.
--- p.85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선아처럼 반항할 줄 알았더라면 다치지 않았을까. 도망가지 않고 선아처럼 다시 한번 경찰이라도 찾아갔으면, 계단에서 구르지 않고 다리도 다치지 않았을까. 그럼 지금 화연과, 선아와 함께 뛰어갈 수 있었을 텐데.
--- p.92
“예전 일을 기억하는 건 산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뭔 일이 있든 우리가 기억해서 뭐하게.” / “이렇게 크고 복잡하고 오래된 지하에 별일이 다 있었을 테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별의별 사람이 왔을 거고 별의별 일이 있었을 거야. 우리는 딱히 결정권이 없어. 위에서 흘러오는 대로 쌓이는 것뿐이지.”
--- p.101
화연은 항상 챙겨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나에게 빵을 하나 건네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물었고, 그 뒤로 난 화연에게 언니가 되었다.
--- p.105
“그래서 어쩌라고. 다른 사람 위해서 한 일이 나한테도 중요하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나 혼자서는 살아갈 의지가 없어도, 남이 더 소중하면 그렇게 살 수도 있잖아.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남에게 주고, 내가 필요한 위로를 남에게 전하고, 내가 원하는 희망 남에게라도 남기고. 자기만족이라 해도 원래 그러면서 사는 거래. 나를 위한 건지 너를 위한 건지 모르게 되면서 우리를 위한 게 되는 거지.”
--- p.108
“지상엔 저런 인간들투성이였어. 애들이라고 지 입맛대로 이용하고 휘두르려는 쓰레기들.” / 어르신도 비슷한 말씀을 했었다. 지상에 있든 지하에 있든 하던 짓 똑같이 한다고 했지. 화연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 “나, 올라가면 이번에는 제대로 살고 싶어.”
--- p.166
아이들은 주머니에 있던 분필 몇 조각을 꺼내 화연의 무덤 근처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연의 무덤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두른 작은 돌덩이들 위에도 구름과 꽃을 그려놓았다. 지하에 사는 사람들과 방의 풍경까지 보였다. 긴 머리 치렁치렁하게 내리고 이불에 동그랗게 말린 나도 보였고, 몸집 큰 은혁과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앉아 있는 어르신, 어르신 방의 탁자와 과자 더미도 보였다. 큰 배낭을 멘 표 교수는 한 손에 책을 들고 뭔가 가르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삐뚤어진 안경을 쓴 한오 옆에는 가지런히 쌓인 상자들과 초록 모자를 쓴 양 씨 할아버지의 화난 얼굴도 있었다.
--- p.193
나오는 것은 나오기를 결심하는 것보다 쉬웠다. 내려왔던 길과 반대로 하염없이 위로,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길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