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일이 무샤르 선생의 ‘신심’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한국 시의 특별한 면모에 대한 무샤르 선생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발견을 보편적 동의로 만들고 그 이해를 심화,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의 실천으로 이어감으로써 값진 결과들을 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헌신은 결국, 변방의 한국 문학을 세계 문학의 독자적인 한 단위로 등록시키고자 하는 오래된 염원에 중요한 초석을 놓는 일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무샤르, 서쪽에서 온 고운 스파이 │ 정과리(문학평론가)」중에서
“당신이 당신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내가 김혜순 시인에게 프랑스 시 전문지 『포에지Po&sie』의 두번째 한국 시 특집호를 준비하면서 느낀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그녀는 우정어린, 따뜻한 목소리로 위와 같이 말해주었다.
---「한국의 희미한 불빛 언어들」중에서
프랑스 언론이 한국의 경제적·사회적 도약을 주목하고, 많은 한국인이 프랑스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무지했기 때문에, 지난 세기 동안 한국이 겪은 수난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 이후에 계속된 폭력적이고 참혹한 독재의 시절에 대해 이청준에게 물을 수 없었다. 그의 소설에서는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의 대립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의 전부인가?
---「불 꺼지는 소리가 무섭소」중에서
1934년 12월 24일에 발표된 윤동주의 시 「삶과 죽음」은 시간을 찢으며 나타난다. 이 시가 보여주는 갑작스러움, 나는 그것이 한국 시인들의 작품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았다. 소곧감이 돋보이는 위의 시에서 인간의 삶은 노래와 춤 그 자체로 표현된다. 하늘 한복판에 던져진 생은 곧 중단될 것이다. 그 생은 어떤 흔적들을 남길까? 무엇을 “알 새기듯이” 한다는 것이며, 어떤 하늘 위에 흔적을 남겨 빛의 글쓰기를 하겠다는 것일까?
---「세상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중에서
낯설면서도 친숙한 이상, 그는 자신의 작품 안에 세계의 공기, 또는 시간을 압축해 넣어놓는 듯하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겪었던 한국과 일본에서의 불행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는 20세기 근대화의 시공간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꼈던 것 같다. 그의 너무나도 구체적인 추상의 몽환적 작품들은, 반세기 후 중국 시인 구청의 ‘잘못 펴진 땅’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 속에 잠시 머물다가 타버린」중에서
우리는 왜 특별히, 번역시 읽기를 망설이는 것일까? 어떤 이는 번역시를 읽는 것은 진짜 시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가 읽는 글이 번역된 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본래의’ 언어로 씌어진 시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짜 시’가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시는, 특히 현대시는, 또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언제나 열어둔다.
---「불란서에 가더라도」중에서
너무나 빈곤한 공동체의 삶은 기형도의 작품에서 언제나 위태로워 보인다. 그 무엇이 시인의 글 속에 은밀히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생을 붙잡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곧 파괴될 듯 숨 막히게 일어난다. 그리고 시는 해체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존재가 발생하는 곳, 존재 사이의 떨림을 만들어내는 지점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중에서
나희덕의 모든 작품은 빠르게 일어나는 예민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한다. 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가 있다. 나무의 고운 빛깔이 우리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지만 나무는 곧 멀어져 이내 과거가 되어버린다…… 시를 통해 우리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것이 금세 몸을 감추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복숭아나무라는 예민한 사건」중에서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아주 독특하고 불안한 소설 중 하나이다. 인물과 사건, 모든 것이 끝없는 혼란에 휘말린다.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허구적 주관성의 외면과 내면, 그리고 육체 사이의 모든 경계가 무너진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신경숙의 『외딴방』.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의 이 소설에 나오는 열여섯 ‘나’의 위험한 꿈은 바로 작가가 되는 것이다. 꾸밈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꿈을 털어놓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외사촌뿐 아니라 독자들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금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조차도…… 수줍은 속에 눈부신 싱그러움이 밀려든다.
---「입속에서 굵은 모래가 서걱거렸다」중에서
김혜순을 읽으며 우리는 기이한 환희를 경험한다. 절대 사나움을 잃지 않은 환희. 시인에게, 시는 자신에 대한 자신을 포함한, 지배 세력을 실질적으로 즉시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것의 언어이며, 굴복하지 않는 용기이다. 스스로에 대한 정의나 이미지가 붙잡아놓은 것에조차.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중에서
어느 날 저녁, 산속의 텅 빈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불현듯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이청준은 내게 미소를 지었고, 나는 국그릇에 눈물을 떨구었다. 나는 처음으로 슬픔이 아닌 다른 어떤 각별한 감정으로 비롯된 눈물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흘렸으며, 그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프랑스어 단어가 내게는 없다.
---「예측할 수 없는 한국 문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