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짜타 못 가의 광경은 참혹하고 거부감을 일으킨다. 끊임없이 질문이 쏟아진다. 천사는 “이따금” 조용히 내려와 물을 휘젓고 “첫 번째” 병자만이 치유된다. 기적은 여기서 끝이 난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만큼일 뿐이다. 생각과 논리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된다. 엄청난 고통, 설명이 되지 않는 불의, 답변 없는 질문들이 터져 나온다. 하느님의 자비는 미미하다. 오직 한 사람, 첫 번째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어떻게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정의, 그분의 겸손을 어떻게 논할 수가 있으며, 그분의 현존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그분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p.22~23
하느님께서는 지금은 부재하시고 언젠가 어딘가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현존하시고 계시는 분이다. 복음사가들과 우리의 교부들이 “나타나시다” “숨은 곳에서 나오시다” “우리에게 드러내시다”와 같은 표현을 애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볼 수 있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순간과 우리의 순수하고 깨어 있는 마음이 잘 만나야 한다.
--- p.28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다고 느끼셨던 그 순간이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신 순간이었다. 하느님의 섭리의 사역이 성취되던 순간에 하느님께서 부재하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유혹에 시달릴 때,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아주 강렬할 때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은 분명하고 완전하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부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잃게 될 건강을 얻거나 또 언젠가는 끝나게 될 우리의 삶을 위협에서 구하시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축복에 대해, 즉 구원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고 그 일원이 되어 우리의 하느님과 구세주를 “얼굴을 맞대고” 뵐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해서 말이다.
--- p.29~30
만약 안드레아스의 상태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태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비웃고 그를 선택하셨다. 이 아이는 세상 속에 있는 하느님의 보석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 고린토 1:25)
--- p.69~70
고통은 사람을 너무 예민하게 만들어서 깃털조차도 견디지 못하는 눈처럼 만든다고, 대(大) 바실리오스 성인께서는 슬픔에 잠긴 아비에게 말씀하셨다. 이처럼 가장 부드러운 움직임조차도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아주 비슷한 상황의 신중한 비유일지라도 그를 온전히 위로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주장처럼 표현되는 말은 견디기 힘들만큼 그를 괴롭힌다. 오직 눈물, 침묵, 내적인 기도만이 그 아픔을 완화시켜 줄 수 있고, 어둠을 밝히거나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 p.104
암 환자의 눈빛은 특징적이다. 작은 희망에 목마른 간절한 눈빛, 지푸라기라도 잡고 살고 싶어 하는 애절한 눈빛이다. 마지막으로, 이 병은 ‘왜’ ‘혹시’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실 수 있지?’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와 같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 동시에 기도 - 만일 들으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면 - 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하느님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게 하는데, 이는 인정하건 하지 않건 간에 종종 의식적 갈등을 불러온다.
--- p.117~118
병원에서의 삶에는 믿기 힘든 오르내림이 있다. 오늘 나는 의사 팀 전원이 한 아이를 살려 내기 위해 벌이는 격렬한 전투를 피부로 느낀다. 마가리타는 레로스에서 온 두 살 반밖에 안 된 아기이다. 심장내과와 외과 전문의, 중환자 전담의, 간호사, 의료기사 모두가 해부학적으로 열한 가지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가진 아이의 작은 심장이 멈추지 않고 박동할 수 있도록 초인적인 사투를 벌인다. 만약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난다면,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찢어지고 말 것이다.
--- p.144
“사랑하는 가족 모두가 다 함께 떠나서 많이 힘드시죠?” “주교님, 만약 아이들이 지금 하느님 곁에 있다면 제가 아이들과 꼭 같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요. 게다가 아이들은 우리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녀이니까요. 앞으로 저는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제 자녀들과도 더욱 가까워질 테니까요. ...”
--- p.169
참으로 이 세상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가 이해하는 그런 신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때 세상은 살 가치가 전혀 없는 곳이다. 끝이 있는 생명, 합리화되는 신,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물론 존재하지도 않는다. 비밀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시도는 헛수고일 때가 잦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는, 고통은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잘못된 종류의 신과 함께하는 것으로는 위안을 찾을 수 없다. 하느님 안에서 고통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때 우리는 고통을 통해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
--- p.170~171
“얘야, 왜 그렇게 내 손을 꼭 쥐고 있니?” 내가 난디아에게 물었다.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붙잡고 싶어요.” “그런데 너는 지금 덧없는 걸 붙잡고 있는걸.” “주교님, 저는 제가 아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을 제게 알려 주신 분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거랍니다.”
---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