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암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하워드 진의 대표작
이 책에도 콜럼버스와 ‘건국의 아버지들’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콜럼버스 개인이 아닌, 콜럼버스와 미국 원주민들과의 상호작용이 제기한 문제들에 있다. 미국의 창건자들은 뛰어난 정치가임에 틀림없지만, ‘평등’을 두려워한 부유한 백인 노예주이자 상인, 채권 소유자로서도 그려진다. 여타의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전쟁, 반란, 정쟁 등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전쟁과 더불어 전쟁에 대한 저항을, 불의와 더불어 불의에 맞서는 반란을, 이기심과 더불어 자기희생을, 폭정 앞에서의 침묵과 더불어 도전을, 무정함과 더불어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보려는 하워드 진의 관점에서 비롯한다. 그는 아라와크족의 시각에서 본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역사를, 노예의 관점에서 본 헌법제정의 역사를, 체로키족의 눈에 비친 앤드루 잭슨의 역사를, 뉴욕의 아일랜드인들이 본 남북전쟁의 역사를, 스코트 부대의 탈영병들이 본 멕시코 전쟁의 역사를, 로웰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눈에 비친 산업주의 발흥의 역사를, 쿠바인들이 본 스페인·미국 전쟁의 역사를, 루손 섬 흑인 병사들의 눈에 비친 필리핀 정복의 역사를, 남부 농민의 시각에서 본 금박시대의 역사를, 사회주의자들이 본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평화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할렘 흑인들의 눈에 비친 뉴딜의 역사를, 라틴아메리카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느낀 전후戰後 미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이 책은 여러 고전들이 견지하는 역사로서의 ‘총체성’과 ‘일관성’을 견고히 유지하며 미국사의 거대한 흐름을 담고 있다. 또한 기존 역사에서 소외당한 파편화된 역사도 놓치지 않고 해체되어 있던 수많은 민중들의 목소리, 지워진 기억,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촘촘히 아로새기며 ‘유기성’과 ‘다양성’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미국민중사』는 미국 역사의 총체적인 흐름과 그 속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면서, 과거와는 다른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지침서다.
* ‘미국’을 묻기 전에 ‘역사’를 말한다. - 미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진Zinn의 관점 엿보기
수많은 미국사들 가운데 『미국민중사』가 독보적인 지위를 20년 넘게 유지해온 비결은 바로 ‘관점’의 독특함에 있다. 누구 말대로 역사는 곧 ‘관점’이다. 원제에 ‘피플스 히스토리People History’라고 못 박은 그 ‘피플’의 시선. 지은이는 ‘피플’의 ‘시선’과 이야기를 조합해 이 책을 완성했다. 독자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되었다는 전제에서 미국을 읽게 된 것이다.
국가의 기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어떤 나라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 및 성별상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격렬한 갈등을 감추고 있다. 이런 갈등의 세계, 희생자와 가해자의 세계에서 알베르 카뮈의 표현처럼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생각 있는 사람이 할 일이다.
그리하여 역사에서 선택하고 강조하는 행위로부터 나오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희생자의 눈에 비친 미국의 역사를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건 아무리 애쓰더라도 한계에 부딪칠 정도까지 다른 이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자’ 한다.
내 말의 요점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가해자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향해 던져진 눈물과 분노는 현재를 위한 우리의 도덕적 에너지를 고갈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구분선이 항상 분명하지만도 않다. 장기적으로 보면 압제자도 결국 희생자이다. 단기적으로 스스로가 자포자기하고 자신을 억누르는 문화에 오염된 희생자들이 다른 희생자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런 복잡한 현실을 풀어나가는 동시에,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장한 거대한 거미줄로 보통 사람들을 사로잡으려는 정부의 시도를 회의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나는 체제의 화물칸에 빽빽하게 갇힌 희생자들이 서로에게 가한 잔인한 행위를 간과하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희생자들을 낭만적으로 그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민중운동을 위해 승리의 기록을 날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 서술의 목적이 과거를 지배하는 실패만을 요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사가들은 끝없는 패배의 순환에서 공모자가 되어 버린다.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또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도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힘을 모으며, 때로는 승리한 잠재력을 보여준 과거의 숨겨진 일화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 한다. 어쩌면 순전히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의 견고함에서가 아니라 덧없이 지나간 공감의 순간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둔감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역사를 대하는 나의 접근법이다.
* 전쟁…… 그리고 지워진 민중들.
인디언들은 힘들게 바다를 건너온 콜럼버스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황금에 눈이 먼 콜럼버스와 그의 후예들은 대량학살로 인디언들에게 보답했다.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기실 ‘부상하는 강국인 미국을 위해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시마가 “군사적인 목표물”이기 때문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10만 명 거의 전부가 민간인이었다. 베트남전에 대해서 모든 대통령들이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전쟁이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을 것이라고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남베트남에 아시아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는 미국의 전초기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욕심 때문에 희생된 베트남인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아버지 부시는 1991년 쿠웨이트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부시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라는 거짓된 명분을 앞세워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실제로는 중동의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콜럼버스로부터 이어진 이 모든 유혈과 속임수가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인종말살의 이야기를, 보다 중요한 인간 진보의 이야기 속에 묻어 버린 모리슨이 옳았던 것일까? 스탈린이 소련의 산업 발전을 위해 농민들을 죽였을 때라든지, 처칠이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를 폭격했을 때, 트루먼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했을 때 말한 것처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손실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잠깐 언급해버려 득과 실의 균형이 도무지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정복하는 측인 “진보된” 나라의 중간계급과 상류계급은 그런 재빠른 처리(“그래, 유감스럽기는 하나 어쨌든 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의 죄수들, 도심 빈민가의 흑인들, 지정거주지의 인디언들-세계의 소수 특권층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바로 그 진보의 희생자들도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국의 광부와 철도 노동자들, 공장 직공들, 일터나 집에서 사고와 질병으로 수십만 명씩 죽어간 남성과 여성들-진보가 동반한 인적 손실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과연 그런 서술이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을까?(단지 피할 도리가 없었던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심지어 소수 특권층까지도-조직적인 반란이나 비조직적인 폭동, 법률과 국가에 의해 범죄라는 딱지가 붙은 개인적인 절망감의 폭력적 분출행위 등으로 표출되는 희생자들의 분노 때문에 위협받게 될 때, 아무리 특권을 누리고 있어도 버릴 수 없는 현실감각을 갖고 그런 특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만약 인간 진보를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희생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희생당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는 게 가장 중요치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질병이나 건강, 삶이나 죽음처럼 명백하고 당면한 문제가 아닌 어떤 진보를 위해 다른 사람의 아이들, 심지어 자신의 아이들까지도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으로 던져 버릴 권리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