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金惠經)은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국립대만사범대학교 국문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 옌칭 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1991년부터 국립한밭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로 있다. 명말청초 및 근대의 문학과 사상을 주로 공부하면서 이 시기의 고전을 우리 말로 옮기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역서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분서』 『속분서』가 있고, 그 밖에 『요재지이』(6권)가 있다. 논문으로는 「이탁오와 그의 문학이론」 「호적 연구」(胡適硏究) 등이 있다.
“한글 완역본 '분서'가 나온 지도 어느덧 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이 책은 과분할 정도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책이 너무 늦게 나온 탓도 있겠지만, 이탁오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에 비해 자료가 부재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 부응하려다 보니 '분서'의 역자로서 '속분서'에 손을 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분서' 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주지는 않았다. 수많은 용례 가운데서 적절한 뜻을 찾아내 그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했을 때의 기쁨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와 진배없었고, 혹은 퍼즐을 하다가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찾아내 맞춰 넣는 희열이기도 하였다. 간혹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분서'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 김혜경
이지(1527~1602)의 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이다. 조상 중에는 페르시아 만을 오가며 무역을 하다가 색목녀를 아내로 맞거나 이슬람교를 믿은 이도 있었지만, 이지 본인은 중국의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훗날 노장과 선종, 기독교까지 두루 섭렵한 이력으로 인해 그의 사상은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는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해 하남과 남경, 북경 등지에서 줄곧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전후 되던 해 요안지부를 끝으로 퇴직했다. 이지는 40세 전후 북경의 예부사무로 근무하던 중 왕양명과 왕용계의 저작을 처음 접한 뒤 심학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어 불교에 심취하고는 62세에 정식으로 출가했다. 그는 유불선의 종지가 동일하다고 인식했고, 유가에 대한 법가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소설과 희곡과 같은 통속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평론 활동을 폈다. 유가의 정통관념에 도전하는 『장서』를 집필했고, 공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경전을 해설한 『사서평』을 출간했으며, 선진 이래 줄곧 관심 밖에 있던 『묵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다. 이렇듯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고 송명이학의 위선을 폭로한 그에게 세인은 양쪽으로 갈려 극단적인 평가를 부여했다. 결국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있던 중 7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작들은 명과 청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 또한 횡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