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7월 20일, 대구시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1940년 충남 공주여자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 4년 후 졸업하여 1944년 모교인 경북 의성읍 의성 중부국민학교 훈도로 부임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에서 좌익 대표로 연설한 박종근을 만나 1947년 6월 10일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12월 3일 남편 박종근은 공부를 더 하고자, 그리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고, 1948년 4월 딸 박소은(아명은 옥경)이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951년 남편 박종근이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1952년 3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남편 박종근은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했으며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전쟁 기간 동안 ‘빨치산’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남부군이 결성된 후 제3지대에서 책임자로 활동했다).
1953년 9월 10일 의성 남부국민학교로 복직했고, 1954년 8월 대구 중앙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복명국민학교로 다시 전근해 근무하던 1959년 8월 어느 날,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출감 후 다시 교직에 복직했고, 중앙, 복명, 대구국민학교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운 사실이 알려져 여러 차례 교육자 특공상을 받았다. 1963년 경북교육국 장학사(전국 초등계 초대 장학사)로 발령받았고, 1964년 경북 교육위원회 초등교육과 장학사로 임명되었다. 1973년부터 2년 동안 오스트리아에서 특수교육 연수를 받았고, 귀국해서는 경북도교육연구원 연구사로 일했다. 1976년 3월 남편 박종근 사망 신고를 했고, 1977년 사표를 제출하고 딸과 사위가 있는 서독(지금의 독일)으로 떠났다. 1990년 자서전 집필을 시작했다. 1995년 일시 귀국 중 해방 50주년 특집 〈말〉과 〈공동선〉에 처음으로 삶의 단상을 공개했다. 그해 12월 평양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약 2주간 체류, 남편 박종근의 열사증, 국기 훈장 및 영웅칭호 수여증, 조국 통일상을 받고 독일로 돌아갔다. 2000년 6월 그동안 거론되던 회고록 출간을 준비하러 한국에 일시 귀국했다가 8월 28일 대구 가톨릭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