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렇게 어영부영, 흐지부지 기자가 된 나는, 지난 2019년부터 넘쳐흐를 것 같은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따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그러한 작업은 인스타그램 계정 ‘고기자’(@gogizanim_)를 통해 풀어놓고 있다. 내 이야기를 올릴 때도 있고, 동료들의 이야기를 올릴 때도 있다. 그냥 술에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마음에 그린 그림을 혼자 모아두려고 만든 공간인데, 어쩌다 보니 내 생각보다는 일이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하다. 때로는 기사 쓰기보다 어려울 때도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고기자는 내 이름을 걸고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의 데스킹도 받지 않는다. “제목이 너무 아프니 고쳐 달라”, “이런 걸 더 반영해 줄 수 없느냐” 하는 식의 불편한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도 꽤 의미 있다. 사실 어렸을 때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언젠가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바란 적이 있다.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니 가끔은 벅차오른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고,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는 동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기가 크게 어렵지 않다. 다양한 모습의 인간을 그리기보단 고양이로 표현하기가 더 쉽고, 어떤 편견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매일 출근을 할 때마다 만화 소재가 생겨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언짢은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차피 난 기자 일을 시작할 때부터 화가 많아질 것을 대충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내 이야기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내가 쓰고 그리는 ‘고기자’가 오롯이 내 이야기는 아니다. 고기자가 내 ‘부캐’도 아닐뿐더러,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은 관계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만든 존재에 가깝다. 나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고, 아마 그들도 나를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느슨하게 묶인 채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를 묶어 주는 그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연대’라는 뻔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래 고민 중이고,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됐다.
---「1. 들어가며」중에서
거창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망설여지지만, 고기자의 의미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의 본령은 결국 ‘총체적 진실’이라는 다소 아득한 목표를 향해, 사실들을 모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아닐까. 그 흐르는 방향이 이른바 ‘사회적 약자’가 반드시 옳으며 선하다는 쪽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기 더 어려운 이들은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의 키를 쥐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빛이 덜 비추는 곳을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저널리즘은 그런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고기자는 지나치기 쉬운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술자리에서 한 번 털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수습을 뗀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인스타그램 자기소개에 여전히 (수습)기자라고 달아 두고, 수습기자의 일상인 ‘뻗치기’나 ‘사쓰’를 지금까지 계속 다루는 이유도 ‘넘기지만은 않겠다’는 의지에서 기인한다.
다들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이야기해 왔지만, 시간은 구조적 폭력과 모순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우리의 ‘업계’ 역시 그럴 것이다. 돌이켜 보면 역사 속 혁명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음에서 위안을 구할 뿐이다. 그냥 두고 넘어갔을 문제를 누군가는 문제라고 기록해 남기고, 그렇게 쌓인 기록은 그 문제가 모두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이 문제임을 알게 되는 순간, 이를 고치기 위한 힘이 작동한다. 그 힘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견고한 구조에 금이 가고, 그 틈새를 따라 우리는 조금씩 전진해 왔다. 우리의 세계는 그만큼 넓어지고, 혼자인 줄 알았던 방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때 세상은 바뀐다.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참기자’가 되기엔 부족했기 때문에 난 내 이름을 걸고 쓰는 기사 외에도 ‘고기자’가 되어서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많은 이들과 소통했다. 그것 역시 어느 정도는 저널리즘이었을 것이다. 아마 몇 년간 그렸던, 많지 않은 만화를 보면서 누군가 문제임을 느꼈다면 내 의도는 조금이나마 달성된 셈이다. 고기자에게 있어서 저널리즘은 거창한 강령이기보다는 작은 일상이자 실천이다.
---「9. 참기자와 고기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