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전체로서의 세계에 관한, 역사와 인간에 관한 진리의 본질적 형태 가운데 하나다. 세계와 관련한 독특한 시각이다. 엄숙한 관점에서 볼 때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세계가 온전하게 다시금 새로이 보인다. 따라서 웃음은 보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기에 엄숙함만큼이나 위대한 문학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다. 이 세계의 본질적인 특정 측면들은 오직 웃음만이 접근할 수 있다. --- p.59
우리는 유머가 쓸데없고 비기능적이라고 여기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유머의 가장 전통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는 사회 개혁이었다. 인간을 꾸짖어 덕성을 갖게 할 수 없었을지언정, 풍자는 그렇게 되도록 할 수 있다. 이 경우 적의는 고상하고 점잖은 결말로 이어진다. “인간들은 설교로는 고칠 수 없던 잘못들을 웃음거리가 되면서 고칠 수 있었다”라고 프랜시스 허치슨은 서술했다. --- p.74
우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이런 확고한 안심감은 여러 경험들 가운데서도 본질적으로 가장 희극적이다. 물론 웃긴다는 의미에서 희극적이라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유머는 그로부터 길러지는 평정심에서 흘러나올 수 있다. 말하나마나, 이것은 비난의 여지없이 완벽하다는 뜻도 아니다. 심오하다고 해서 꼭 타당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방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불행과 차분하게 거리를 둔 채로, 파국을 맞고 피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현실을 어떤 장대한 예술 작품처럼 보는 것이다. --- p.86~87
모든 유머에는, 타인의 곤경을 즐기는 것이 아닌 유머의 경우에도 일말의 ‘샤덴프로이데’가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조롱하는 것은 고유하고 소중한 우리의 이성이다. 자신의 불편으로 즐거움을 내어주는 이는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 p.115
우리는 엄격한 인지 활동에서 벗어나 인과 논리나 비모순율의 껍데기를 벗고, 황당무계하거나 그 자체로 양립 불가능한 것들을 만끽하는 상태로 옮겨간다.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자체라는 공리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제약의 해제가 웃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 p.126
메러디스는 동양에 희극이 없는 것은 그곳 여성들의 낮은 지위 때문이라고 봤다. 여성에게 일절 자유가 없는 곳에는 희극이 부재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성 평등 없이는 진정한 문명이 있을 수 없고 ‘문명이 가능하지 않은 곳에는 결코 희극이 있을 수 없다’.94 문명의 부재 상태에서는 희극 정신이 ‘그것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는 상스러움의 하수구로 빠지게’ 된다.95 여성이 단순 가사 노동자로 축소되는 곳에서는 희극의 형식이 원시적인 경향이 있다. 여성이 웬만큼 독립적이기는 하나 교양이 없는 곳에서는 멜로드라마(통속극)의 형태가 나타난다. 반면에, 성 평등이 이뤄진 곳에서는 희극 예술도 더불어 나란히 융성한다. --- p.157
위트는 세련되고 우아한 동시에 악랄하고 잔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신사의 멋과 오만함을 한데 버무려낸다. 타인에 대한 혐오감을 말장난과 지적인 재간으로 승화하는 것처럼 점잖게 폭력의 방식을 대변할 수도 있다. 이처럼 위트는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형태로 내부자들에 대한 반감을 터뜨리는 동시에 내부자들이 자신의 기교에 감탄하도록 만드는 데 열심인, 오스카 와일드 같은 야심찬 외부자에게는 편리한 담론 방식이다. --- p.195
위트의 쾌감은 복합적이다. 우리는 형식의 예술성, 연기 솜씨, 간명한 언어의 노동 절약형 경제성, 정신의 무제한적 활동, 내용의 역전과 전복, 기습과 전위, 그것을 ‘이해했다’는 지적 만족감,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인격을 동시다발적으로 즐긴다. 재담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악의, 오만, 경멸은 모종의 대리 발산을 허용한다. 순간적으로 잠시 당황하는 위트의 타깃을 보면서는 가학적 쾌감을 얻기도 한다. --- p.205
예술과 마찬가지로 유머 역시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규범들을 멀리하고 상대화하는 동시에 그러한 규범들을 강화할 수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로 유머는 규범을 멀리함으로써 규범을 강화할 수 있다. 생경한 이방인의 눈으로 일상적인 행동을 점검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행동을 바꾸고 고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행동의 타당성에 대한 한층 예리한 감각을 내어줄 수도 있다.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