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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스트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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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5월 3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556쪽 | 624g | 120*188*35mm
ISBN13 9788975276279
ISBN10 8975276279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약간 있으나, 대체적으로 손상 없는 상품
  •  판매자 :   상현서림   평점4점
  •  약간의 밑줄이 보임 ☞ 서고위치:225-09
  •  특이사항 : ☞ 서고위치:225-09 [상현서림]은 현재 1인 체제로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서적의 문제는 저의 불찰로 생겨납니다. 책을 받아 보시고, 기록한 사항과 다른 부분이 발생시 먼저, 저에게 연락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매장을 방문하실 분은 반드시 하루전 전화 통화 후 내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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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신은 뉴욕 허드슨 강을 떠다니다가 중국계 어부의 낚시 바늘에 걸렸다. 둔기에 심하게 맞은 것 같은 두 팔이 첫새벽 어스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조국, 필리핀의 한 블로그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같다고 떠들었다. 물론 비아냥거리는 얘기다. 너덜너덜한 줄무늬 팬티와 명품 에르메나질도 제냐 바지는 양 발목까지 벗겨져 있었다. 구두는 두 짝 다 현장에 없었다. 넓은 이마에는 쇠지레나 부두 말뚝 아니면 얼어붙은 강의 얼음덩어리에 세게 부딪힌 듯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날 오후 나는 쨍한 추위 속에서 웨스트 빌리지에 있는 돌아가신 스승의 아파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파트에는 경찰이 노란색 접근금지 테이프를 붙여놓았다.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뉴욕 경찰이 들어가 보니 집 안이 난장판이었다느니, 사복형사들이 증거물 백에 이상한 물품을 잔뜩 채워 가지고 나왔다느니,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밤중에 고함이 여러 차례 들렸다느니 말이 많았다. 이웃집 노파는 자기네 고양이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녀석이 검은 고양이라는 점을 노파는 강조했다.---pp.8~9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위대한 ‘컴백’은 완전히 좌절됐다. 그에게 명성을 되돌려줄 걸작은 어찌된 영문인지 사라져버렸고,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게 될 엄청난 논쟁은 그의 관 뚜껑 속에 묻히고 말았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뒤에 남은 사람들이 물려받은 잡동사니들이었다. 상자에 담다 만 자료들과 가득 차기를 기다리는 상자들, 평생 모은 자료들은 본의 아니게 월요일 아침 분리수거 때 내버릴 쓰레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의 아파트를 뒤져 『불타는 다리』 원고를 찾았다. 나는 원고가 진짜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타이핑을 해가며 원고를 작성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p.12

그를 만난 것은 뉴욕에 도착한 날 아침, 밸런타인데이 전날이었다. 나는 결강한 동안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전해준다는 핑계로 급히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환한 표정으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기관총 소리 같았다. 그는 푹 젖은 바롱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없었다. 옆에는 어제 자 필리핀 선의 부고ㆍ출생난이 펼쳐져 있었다. 필리핀 선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인턴의 실수로 인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미리 작성해 둔 살바도르의 부음 기사가 나간 것이라는 식으로 정정 보도를 올렸지만, 저들의 흐뭇한 낄낄거림이 필리핀의 무역풍을 타고 묻어오는 듯했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나는 그저 잘 다녀오셨느냐고 했다. 그런데 그 질문이 그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크리스핀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마닐라에선 죽은 거지. 난 이제 더 잃을 게 없어.”
그게 그가 죽기 전 두 번째로 본 만남이었다.
이후 바로 찾아온 침묵은 너무 잔인했다. ---p.32

나 자신은 크리스핀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몰랐다. 그가 가버릴 때까지는. 우리 롤로(할아버지-옮긴이), 즉 그레이프스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기에는 너무 무뚝뚝했다. 할아버지들은 그런 경우가 많다. 집무실에 계신 할아버지를 유리문으로 들여다보면 유령처럼 어슴푸레한 그림자로 보였다.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거나 텔렉스가 들어오면 찢어서 읽곤 했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되면 탁자로 와서 나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할아버지의 농담은 늘 억지춘향식이어서 썰렁했다. 내가 그런 얘기를 듣고 웃은 것은 뭔가 관계를 터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스스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당신들의 자식들을 다 키웠다. 어떤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자식농사가 잘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여섯이나 더 떠안게 된 것이다. 마닐라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은 몽땅 배를 타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밴쿠버로 떠밀려오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찍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이제 겨우 외국 생활의 맛을 알게 됐는데 말이다.
---p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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