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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중고] 김치와 우메보시
윤기
예지(Wisdom) 200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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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중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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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놈'과 '야츠'
'놈'과 '야츠'
코스모폴리탄의 운명
혼혈아로서 바라는 것
마음의 가족
기쁜 소식
치마저고리의 일본인
엽서 한 장

2. 우메보시가 먹고 싶구나
죽은 지 13일 후에 발견된 주검
노인홈 건설
반달 할머니
일본 최고의 액션스타
우메보시가 먹고 싶구나
모처럼의 행복
할머니의 고향
"우리는 반 쪽발이야"
한 겨자씨만큼의 믿음

3. 위대한 출발
민단 방문
중증장애자의 대부
기부에 인색한 재계
외교관의 세계
산 위의 빗방울
위대한 출발
11시에 만납시다
제주도의 꿈

4. 움직이는 청구서
역사적인 첫발
도둑놈 아냐?
호랑이 굴에 들어가다
기사를 읽은 사람들
고전무용보다 발레가 좋다
사전 협의
영웅을 움직이는 힘
움직이는 청구서
진실의 꽃
긴 터널
허무한 성공
밝은 곳으로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88쪽 | 407g | 128*188*20mm
ISBN13
9788989797005

책 속으로

오차노미즈의 기독교회관 안에 있는 공생복지재단 도쿄사무소에는 5,6명이 일하고 있었다. 해외 아동관계를 담당하고 있는 미쯔하시 씨, 노인홈을 담당하고 있는 이케도 씨, 파트타임의 하야미씨, 자원봉사자인 이마무라 씨와 그 친구들, 그리고 우리 부부다. 여기에 스가하라 분타 씨의 부인인 후미코 씨가 가세했다. 공생복지재단 도쿄사무소 소장이라는 직책으로, 노인홈을 만드는 모임의 담당자를 겸해서, 물론 보수는 전혀 없고 순수한 봉사였다.

후미코 씨는 검소했다. 일류배우의 부인이라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매우 밝았다.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나 같은 사람은 비교도 못 할 정도였다. 전 후생장관의 하야시 요시로 씨, 중의원, 일본국유철도 총재였던 다가키 분베 씨, 일본무역진흥회장의 미즈가미 다츠조우 씨, 아사히신문의 이치리키 히데오 씨,요미우리 신문사의 마루야마 이와오 씨 야구선수 장훈 씨, 작가인 이노우에 야스시 씨, 주식회사 덴츠의 나리타 사장,이런 분들에게 협력을 부탁했다.

--- p.198

출판사 리뷰

일본 양심의 건설
형식적인 규탄대회, 과격한 구호, 현수막, 화형식, 감정적인 여론, 이를 바탕으로 한 정부 차원의 항의. 일본의 극우적, 반역사적 발언이나 행동이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대응해 왔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한일관계의 문제해결은커녕 진정한 화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서로의 진정한 마음에서 출발하여 양국의 양심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한일간의 삐뚤어진 관계를 청산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일구어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일본 시민들의 반대운동, 철로에 떨어진 술 취한 승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수현 씨의 예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 한국인 아버지, 일본인 어머니를 두고, 일본 국적을 가진 한국인 윤기가 있다. 죽은 지 13일만에 발견된 재일 교포 1세 노인에 관한 기사에 충격을 받은 그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기로 이름난 일본 땅에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재일 한국·조선인만을 위한 노인홈(양로원)을 일본 정부와 민간인의 모금만으로 건설한다. 윤기 본인이 쓴 "일본 양심의 건설"의 이야기, 『김치와 우메보시』는 한일간의 아름다운 화해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추천평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92세다. 1951년 광주 도청으로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러 떠난 후 지금까지 행방불명이시다. 1928년 거리에서 전도를 하던 아버지 윤치호는 다리 밑에 떨고 있는 거지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생활을 했다. 이것이 목포 공생원의 시작이다. 고아들의 수가 늘어나고 힘이 필요할 때 목포 정명학교 음악선생이었던 일본인 어머니 다우치 치즈코(한국이름 윤학자)가 도와주었다. 그러나 8·15 광복의 감격 속에서 아버지는 친일파로 몰렸다. 또 6·25 동란으로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인민재판을 받았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끌려가 스파이 혐의로 고생을 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50년이나 된다. 살아 계시리라는 희망을 안고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아오고 있다.

아버지 없는 공생원을 지키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고아들 속에 나를 집어넣고 키우는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5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일본인이었던 어머니를 목포시에서는 개항 최초의 시민장을 치러 명복을 빌어 주었다. 시민장은 국적보다 인간이 우선 한다는 정신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일생을 기록해 『어머니는 바보야』라는 책을 냈다. 이것이 원작이 되어 <사랑의 묵시록>이란 최초의 한일합작 영화가 제작되었다. 한국에는 개봉이 안 되었지만,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길이 남을 작품이라고 평가해 주었다.

26세 총각으로 공생원의 원장이 된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1968년 공생원은 빚더미에 올라앉은 난파선이었다. 그때 하나님은 내게 첫 번째 영감을 주었다.

"아버지 윤치호를 생각해라. 신념을 가져라."

부모님을 흉내낸 것은 아니지만, 나도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일본의 박애사라는 아동복지시설에 근무하던 여성이었다. 결혼 선물은 달랑 성경책 하나였으나, 아내가 기뻐해 준 것이 고맙다. 감사하게도 결혼기념으로 두 가지의 선물을 공생원에 할 수 있었다. 결혼 축의금과 아내의 지참금 그리고 장인의 도움을 얻어 목포 앞바다 고하도의 국유지 9만 평을 구입한 것이 그 하나이고, 황량하기 짝이 없던 공생원 뜰에 사철 푸름을 안고 있는 히말리야시다 1백 주를 심은 것이 또 하나였다. 그 고하도에 2005년쯤에는 다리가 연결된다니 꿈만 같다.

그 후 공생원이 서울특별시의 훈련 사업을 위탁 운영하게 되어 사회에 나가는 아동들의 손에 기술 한 가지씩을 들려보낼 수가 있었다. 복지에 있어서 자립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배웠다. 이 훈련원이야말로 곳간 차에서 일등차로 가는 행복의 열차라고 기염을 토했다. 특히 삼성동 훈련원에서 드넓은 운동장을 갖춘 암사동의 새 건물로 옮겼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의 영감을 받았다.

"만족하지 마라.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서 아시아를 도우라."

그렇다. 이제 훈련원이라는 철길이 놓였다. 이 열차는 내가 아니더라도 달릴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미련 없이 원장직을 그만 두었다. 1982년 우리 가족은 일본으로 갔다. 공생복지재단 도쿄사무소를 개설하고 '마음의 가족' 운동을 펼쳤다.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고령화, 기계화에 밀려 정든 고향, 따뜻한 가정, 남을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을 위해 '마음의 가족'이라는 끈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것은 가정의 따스함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외로운 노후를 보내는 노인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랑운동이다.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에서 한 재일 한국인 노인이 돌아가신 지 13일 만에 발견되고, 오사카에서는 6개월만에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나 재일 동포 사회에 큰 쇼크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일본 땅에 한국인 양로원을 세우려는 뜻을 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 몸에는 뜨거운 피가 끓었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힘을 모아 주었다. 덕분에 한국 전통 분위기를 가진 '고향의 집'이 일본에서 최초로 탄생될 수 있었다. 일본 땅에 수만 군데의 복지 시설이 있지만, 한국 노인들을 위한 시설은 1989년 문을 연 '고향의 집(오사카)'이 처음이다.

일본에 온 지 내년으로 20년이 된다. 회상해 보니 감개무량하다. 그 험준한 산들을 어떻게 넘어 왔는가. 그 험악한 바다를 어떻게 건너 올 수 있었는가. 땅 한 평 없는 신세로 일본의 어딘가에 재일 한국인 고령자들이 안심하고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얼마나 동분서주했던가.

이제 '고향의 집'은 널리 알려졌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고 보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줄을 서서 입소를 기다리고 있다. 고베 대지진으로 가혹한 피해를 입은 재일 한국인들은 그곳에도 이런 집을 지어 달라고 간절히 소망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또 많은 사람들의 선의가 모여들고 있다.

금년 2월1일에 준공의 환성이 터졌다. '고향의집(고베)'의 완성이 알려지자 도쿄에서도 고향의 집을 지어 달라고 요청해 오고 있다. 나의 소원은 일본의 중요한 지역 곳곳에 한국인을 위한 노인 홈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꼭 꿈만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중요시하는 것은 이웃을 돕는 정신이다.

그 동안 정말 긴 터널이었다. 어둠 속에서 절망했지만,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는 행운의 기회에 감사한다. 언제나 단거리 선수처럼 달렸으나 결과적으로 긴 터널을 달려야하는 마라톤이었다. 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사랑의 보따리 같다. 조그마한 사랑을 모아 큰 보자기에 싸서 물건이 되게 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사람들이 평가한다."

이것이 내가 살아온 모습이라고 한다면 거지대장의 아들로서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다.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보고 싶다.
---저자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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