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석존이 밝힌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정광여래(錠光如來 ; 연등불)로부터 차례로 53부처님을 거슬러 올라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가르침을 만난 한 국왕이, 모든 중생이 남김없이 구제받는 정토를 건설하겠다고 하는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출가를 하고, 스스로 법장보살法藏菩薩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정토가 실현되는 길을 사유하되 다섯 겁 동안을 하는데, 이것이 사십팔원四十八願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이 사십팔원에 더해서 광명과 수명, 지혜와 자비의 힘이 무한하여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고 서원합니다. 이같이 서원한 법장보살은 그 서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중생에게도 미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겁의 수행을 하여 드디어 아미타불의 정토를 완성하였으며, 그곳에 왕생하면 어떠한 중생도 열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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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에게 귀의하여 구원을 바라는 이가 보리심을 내어 아미타불의 본원을 념하고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정진하면, 그것은 여래와 중생이 하나가 되는 것이므로 여래가 임종을 당한 중생을 맞이하러 온다고 하는 형식을 취하여 현전하리라고 설하는 아미타불의 서원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감동을 갖게 합니다.
이 견불사상見佛思想이야말로 정토교 경전 가운데 가장 초기적인 내용이지만 그만큼 정토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부처님을 뵙고 서방의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하는 것, 이 이외에 더 크고 긴요한 불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여기 옮겨 싣는 정토삼부경의 가르침과 그 인연공덕으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고 왕생정토往生淨土하여 이윽고는 대각을 성취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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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이 부처님 명호는 만덕萬德을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아미타불을 염하면, 나의 마음은 바로 이 한마디 아미타불입니다. 이 한마디에는 아미타부처님의 만덕이 들어있어 나의 마음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아미타여래의 만덕을 불러와서 불가사의를 직접 깨칠 수 있습니다. 정종淨宗의 묘용妙用은 우익대사의 『요해』에 발췌한 “사의 집지로부터 이의 집지에 도달하고, 범부의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을 이룬다(從事持達理持,卽凡心成佛心)’의 두 마디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의 집지(事持)는 사람마다 행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업장이 맑아지고 공부가 순정한 경지에 이르며(垢淨功純), 은연중 도의 미묘함에 합치되며(暗合道妙), 이의 집지(理持)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범부의 마음이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을 이루고 부처님의 마음을 성취함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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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염할 때 세간사에 모두 다 미련을 갖지 않고, 바깥의 온갖 인연(萬緣)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마음에는 오로지 한마디 아미타불을 염하면 바로 일념단제(一念單提; 일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드는 것)입니다. 사의 집지로 이렇게 일체를 놓아버릴 수 있으면 머무는 바가 없습니다. 『금강경』의 종요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입니다. 이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은 본래 등지보살登地菩薩이라야 이룰 수 있는 사事이지만, 범부가 착실히 염불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 도의 미묘함에 합치하여 온갖 인연에 머무르지 않고 쉬지 않고 마음을 내니, 지상보살과 같습니다.
그래서 염불공덕은 불가사의합니다(주문을 수지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사의 집지로부터 이의 집지에 이르기에 이러한 사의 집지를 행하는 범부의 마음은 당하에 부처님의 마음을 성취합니다. 곧 범부의 마음 이대로 부처님의 마음을 이루고, 마음 이대로 부처를 이루며(卽心成佛), 바로 깨칩니다(直接了當). 그래서 염불공덕은 불가사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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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또 아난에게 “염불에 머무는 자의 심인心印은 무너지지 않나니, 또한 이와 같으니라.”라 말씀하셨습니다. 염불에 머무는 사람의 심인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가난뱅이는 보배를 먹은 후 이미 떨어져 죽었고, 사지도 이미 썩었지만 이 보배금병은 마음속에 방광하고 있었고, 악인들도 이미 놀라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는 자는 마땅히 마음속에 착실히 한마디 부처님 명호가 있으면 심인이 무너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심인心印이란 부처님께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써 도장을 삼아 만법을 인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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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은 마음을 전하는 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존의 마음은 현대의 고승인 허운 노화상까지 전해졌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도장을 찍으니, 한맛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 공안의 계시(啓示 ; 일깨워 가르침)에 따르면, 무엇을 견불見佛이라고 하고, 어떻게 하면 견불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더 이상 질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정종에 대해서도 지극히 소중한 법문을 힘껏 선포하였습니다. “염불은 한마음을 중히 여긴다.” 부처님께서 오시든 마구니가 오든 일절 상관하지 말고, 단지 전후가 이어지도록 착실히 전일하게 염할 뿐입니다. 마중 나오는 자에게 큰 소리로 꾸짖습니다. “불법의 당번을 거꾸로 꽂지 말라.”(전도되어 법을 비방하지 말라) 계속해서 지념持念하여 부동하는 사람이 “염불念佛ㆍ견불見佛”하게 된다고 찬탄합니다. “염불하는 때가 견불하는 때이다.”라는 정종의 경구는 허운 노화상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선종 제일 대덕의 정종에 대한 소중한 인증認證입니다.
혹 어떤 이는 말합니다. “당신이 잘못 이해한 것이오. 허운 노화상은 중점은 「부동不動」에 있지, 염불에 있지 않소.” 저는 말하겠습니다. “염불의 중점은 「부동不動」에 있소. 정념이 서로 이어짐(淨念相繼)이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입니다.”
말후에 “염불할 때가 곧 견불할 때이고 견불할 때가 곧 성불할 때”라는 정종의 미묘한 문구를 보충하여 인용하는 것으로 본문의 맺음말로 갈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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