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현대 소설의 총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출세작!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비밀의 문이 열린다
마술처럼 감겨드는 불운한 사랑의 대서사시
중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페인 문학의 전통은 사실주의 문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12세기에 무훈시 『시드의 노래』에서 본격적인 싹을 틔웠던 스페인 문학은 흔히 황금세기라 일컬어지는 16~17세기를 거치며 세계적인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낳았고, 이를 계기로 근대적 사실주의, 휴머니즘적 이상주의, 대화체로 구성된 자연스러운 문체와 강렬하고도 섬세한 수사적 표현,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라는 스페인 산문 문학의 주요 특징을 확립해나갔다. 이 시기 사실주의 문학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피카레스크 소설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세기는 대하 역사 소설에 두각을 나타내며 근대 스페인 문학을 대표하는 페레스 갈도스의 출현이 뒤따랐다. 한편 테레사 데 헤수스나 루이스 데 그라나다 등의 신비주의 문학을 거쳐 20세기 중반에 와서는 사회 전반의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의 작가들(고이티솔로, 미겔 데 우나무노)과 함께 카를로스 푸엔테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등으로 이어지는 마술적 리얼리즘과 환상 문학의 다채로운 진면목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화려한 스페인 문학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스페인 현대 소설의 현주소를 밝히는 이가 여기 소개하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다. 그의 『바람의 그림자』는 2001년 스페인에서 첫 출간 직후 무려 101주 동안 베스트셀러 상위에 머물렀고, 곧이어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 30여 개 국에서 모두 20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마존 닷컴에는 단시일에 100만 부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며, 스페인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와 함께 2000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라라Fernando Lara 소설 문학상’ 최종 후보작, 2002년 스페인의 ‘최고의 소설’ 그리고 2004년 프랑스의 작가, 비평가, 출판업자들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그해 출판된 ‘최고의 외국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언어와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여 전 세계적인 사폰 마니아 층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고전 작가들에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면서도 시나리오 작가로서 현대 영상 문법의 아낌없는 수혜를 마다하지 않는 사폰의 줄기찬 이야기 구성 능력 덕분이다. 사폰이 소설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읽히는 소설, 독자에게 읽는 기쁨을 선사하는 작품의 집필에 두고 있다는 데서도 짐작 가능하지만,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숨가쁘게 읽히는 그 뛰어난 가독성은 이 책이 갖는 최대 장점이자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폰은 『바람의 그림자』라는 단 한 편의 소설에서, ‘포의 미스터리와 공포, 위고의 역사 서술, 발자크의 날카로운 시대와 인물 묘파, 디킨스의 아이러니,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정념, 에코의 잘 짜인 추리 모험담’ 등의 복잡한 요소를 20세기의 유산인 영화적 내러티브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버무리고 있다.
스페인 내전 직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소년이 우연히 갖게 된 한 권의 책과 그 작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사랑과 증오, 복수와 배신, 부재와 상실 등을 이야기하는 장편소설 『바람의 그림자』는 새삼 소설 읽기 그리고 책 읽기의 묘미를 독자에게 마음껏 선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화사한 빛과 뿌연 안개가 공존하는 도시 바르셀로나가 발산하는 독특한 인상이 후안 미로의 회화와 안토니 가우디의 독창적인 건축물들로 형상화되고 이것이 행간 곳곳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또 셰익스피어, 디킨스, 헨리 제임스가 내러티브 소설의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자주 빌려쓴 ‘유령’(혹은 유령의 집)에 미혹된 인간 내면을 이 소설 또한 중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 한편 끝없이 늘어선 열람실, 똑같은 구조의 방과 복도 그리고 거울 등으로 설명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가리워진 진실과 연쇄적 비밀을 숨기고 있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매력적인 공간도 등장하고 있다.
디킨스를 통해 ‘런던’이, 위고를 통해 ‘파리’가 문학적 영예를 성취했듯이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새로이 태어난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소설 문학의 현주소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