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에 어느 고고학자도 명확한 답을 줄 수 없겠지만, 지금으로부터 대략 6,000년 전에 인류가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집단을 이루어 국가들이 태어난 시절에 이미 와인이 보편적인 소비재로 자리를 굳혔던 것만은 확실하다.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와인은 국가적 차원의 정치, 경제, 전쟁, 예술, 문학, 종교 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사랑, 우정, 희열, 분노, 성공, 좌절, 만남, 이별, 증오, 짝짓기 같은 인간의 소소한 일상사와도 끊을 수 없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흔히들 술이 건강에 해롭다고 말하지만, 술이 오랫동안 인간에게 사랑을 받아온 것은 숨길 수도 없으며 거부하기도 어려운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적당한 양의 술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애주가들의 자위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확실한 과학적 근거에 따라 술을 1급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충실하여 한 방울의 술도 악마의 유혹으로 여긴다. 그리고 일부 건강제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일체의 술을 멀리한다. 드물게는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서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술을 무지무지 사랑했던 청록靑鹿파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은 18단계로 나누어진 술의 품계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술을 마시는 사람을 가장 낮은 급수인 9급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9단까지로 나누고 있다. 이 중에서 두 번째 높은 품계인 8단 ‘관주關酒’는 술을 보고 즐거워 하지만 이미 마실 수 없게 된 사람을 말하고, 최고의 경지인 9단 ‘폐주廢酒’는 일명 열반주라고도 하며 이승에서 마신 술이 지겨워 저승의 술 세상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와 같이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지 못하는 분들에게 이 책이 무언가를 기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등산이나 운동으로 땀을 흠뻑 흘린 뒤에 마시는 차가운 맥주의 청량감과 출출한 저녁시간에 삼겹살이 익기도 전에 들이키는 소주 한 잔의 짜릿함을 사랑하며 ‘와인의 세계’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꽤 괜찮은 도우미가 될 수 있다고 졸저의 저자는 확신한다.
--- 「1장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