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유다’라는 딱지는 무려 1,000년도 넘게 동서양 가리지 않고 인류의 뇌리에 박혔다. 그럼 예수는 어떨까? 사랑과 희생의 동의어다. 이기적인 교회와 기독교인은 싫지만, 예수는 좋아한다는 비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예수와 유다처럼 180도로 이미지가 상반된 인물도 없다. 기존 이미지가 더 굳어질수록, 각각이 대표하는 사랑과 배신의 이미지는 더 강력해진다. 유다가 더 나쁜 놈이 될수록 예수의 사랑은 더 감동을 주고, 그럴수록 지옥에서 유다를 기다리는 화염의 불꽃은 더 활활 타오른다. 그런데 정작 이 두 사람의 연관관계를 찾는 ‘정직한’ 질문은 만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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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다. 인류문명을 거스르는 상상을 하나 해보자. 행여 기독교의 손에 과거 서구세계를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중세시대 권력이 다시 쥐어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21세기라고, 이단사냥, 마녀사냥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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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반유대주의와 가롯 유다의 분리는 가능할까? 예수의 십자가에서 유다의 희생이라는 지분을 인정함으로써, 배신자 유다라는 오명을 벗기고 그의 복권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유다가 나쁜 놈이 될수록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사는 길 중 하나가 유다를 ‘더’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다를 향한 이성적 판단이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건 무려 2,000년 가까이 지속된 기독교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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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 유다에게 상식을 적용하는 순간 기독교에는 위기가 닥친다. 복음서가 유다를 철저하게 배신자, 악인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단정한 악인을 아니라고 하는 건, 성서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중세시대였다면 화형감이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였고, 나아가서 복음서 속 모든 내용을 역사라고 확신하는 기독교에서 이성과 상식보다 중요한 건 성서의 권위다. 아무리 이성에 반한다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다를 배신자로 고수해야만 한다. 유다를 덮고 있는 맹목적 증오를 걷어내는 게 불가능한 이유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두 개다. 이성에 역행하는 복음서의 권위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이성과 상식을 성서에 적용할 것인지. 다른 말로, 기독교를 진리로 받아들일지의 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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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복음서를 통틀어 유일하게 유다에 관한 신상정보를 공개한다. 예수의 회계담당이고 수시로 공금을 횡령하는 도둑이라는 것. 그는 단지 돈벌레가 아니라 상습 범죄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은돈 30닢과 관련해서 심각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궁금함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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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마가복음에서 스승을 오해한 제자, 열심이 넘쳤던 제자, 스승을 너무도 믿었기에 그만큼 실망이 컸던 제자, 그리고 누구보다 예수를 과대평가했던 제자로서 여지가 있었던 가롯 유다는 마태복음에 와서 완전한 돈벌레로 전락했다. 이제 그에게 좌절한 이상주의자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가와 마태가 그린 유다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유다의 배신과 사탄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마가와 마태에게 사탄은 ‘당연히’ 예수의 십자가를 막는 존재다. 따라서 유다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가장 ‘반사탄적’인 인물이다. 물론 기독교는 이런 유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쨌든지 사실상 사탄의 목적을 허물어버린 유다. 나름 근사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제 180도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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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 유다라는 인물, 즉 배신자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려면 은밀하게 예수를 체포해야만 했다. 왜 꼭 그래야만 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고자,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민중의 소요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지”라는 답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복음서의 핵심 메시지는 로마가 아니라 유대민족이 예수를 죽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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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들어와서 유다는 입체적 인물이 된다. 예수 무리의 회계 담당이며 돈 욕심이 많아서 공금을 수시로 훔치던 도둑이라는 것이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요한이 만든 유다의 모습은 결국 유대민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 속 악독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유대인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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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자. 사탄이 바보인가? 이것저것 다 떠나서, 사탄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게 말이 되나? 예수가 안 죽어야 자기가 무궁무진 잘사는 걸 몰랐을까? 설마 예수를 죽여야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착각했을까? 아니, 예수가 3년 동안 그게 아니라고, 내가 죽어야 승리한다고, 그래야 부활해서 사탄을 박살 낼 것이라고 그토록 가르쳤는데? 그 모든 가르침을 사탄의 하수인 유다도 들었다. 그럼 사탄도 다 안다는 건데, 그런데도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고? 아니면 십자가의 비밀은 오로지 유다가 자리를 비웠을 때만 들려줬다고 봐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사탄이 예수의 말을 안 믿었다고?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밀어붙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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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리도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라면, 예수의 구원자는 가롯 유다다. 예수의 희생을 가능하게 만든 진짜 희생자는 유다다. 우리가 예수에게 감사한다면, 예수는 유다에게 감사해야 한다. 유다에게 큰절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논리적이지만 가능하지 않다. 예수의 은혜와 사랑을, 공적을 누군가와 나눈다고? 여전히 기독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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