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했단다. 말로만 듣던 성적 비관 자살 시도가 우리 집 이야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인터넷을 뒤졌다. 어디에서도 언니의 소식을 찾을 수 없었다. 토막글은커녕 한 줄 기사로도 나오지 않았다. 자살 시도가 그만큼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 사고인 걸까? 무엇보다 나는 언니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데 무척 놀랐다. 인서울 의대. 그게 목표가 아니라면 언니는 이미 대학생이 되고도 남았다. 고집스레 삼수까지 하는 게 내 눈에는 참 융통성 없어 보였다. 공부한답시고 까칠하게 구는 건 못 봐줄 노릇이지만, 부모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언니가 미련한 바보 같아 불쌍하기도 했다. 모의고사 날, 언니는 학원 옥상에서 난동을 부리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엄마는 뛰어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 말을 하고 또 했다. 아빠에겐 말하지 말라며, 나만 입 꾹 다물면 된다고 했다.
---「새삼 강한 빛과 별」
형은 고1 때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 애리조나주로 유학을 떠났다. 나라에서 학비를 대 주니 돈이 들지 않는다며 부모님은 뿌듯해하며 잔칫집마냥 친척들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형을 대신해 친척들이 묻는 말에 대변인처럼 대답하며, 건더기는 뵈지도 않는 칼칼하고 매운 해물탕 국물만 진탕 들이켰다. 속이 얼얼했다. 일 년이 다 되어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화 체험 명분으로 간 단기 유학은 일 년 과정이었지만, 좀 더 공부하고 싶다며 부모님을 설득해 사립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로 부모님은 형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기 위해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새벽에 시작한 일과가 다음 날 새벽에 끝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두 분이 통장을 들여다보며 한숨 쉬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중3 여름에 나는 자연스럽게 빅 데이터 정보 산업 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빨리 사회에 나가 돈 벌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대놓고 표현은 못 해도 내심 반가웠을 것이다. 내가 일반고가 아닌 특성화고를 지원한 이유는 가족을 위한 희생과 배려, 화합, 뭐 그런 차원이지, 절대 공부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와선 후회하지만.
---「짐승의 여름 방학」중에서
엄마는 자기가 입시생인 것처럼 항상 여유가 없었다. 어린 나를 키울 때도, 아빠를 떠나보낼 때도, 나와 떨어져 지내는 지금도 두 발을 동동거리며 종횡무진 바쁘게 움직였다. 휴대폰을 뺏으러 온 날도 엄마는 47점짜리 수학 성적에 분노하며 342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운전해서 왔다. 마침 그날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엄마는 제사나 명절에도 수업 때문에 바쁘답시고 고향에 온 적이 없었으니까. 할아버지 영정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도 엄마 본심은 딴 데, 47점짜리 수학 성적표에 가 있었다. 엄마가 자기 아빠인 할아버지의 제삿날조차 기억 못 하는 게 불쌍했다.
엄마와 함께 살던 때는 학원에서 학원으로, 해가 달로 바뀔 때까지 달리기 선수처럼 뛰었다. 수유동 아이가 대치동 아이처럼 생활하는 건 힘들었다. 동네 애들처럼 학원 대신 학습지나 풀면서 티브이 보다 잠들고 싶다고 매번 찡찡거렸다. 그러면 엄마는 자기는 스무 살에 서울로 와서 직접 돈 벌어 대학 다녔다며 나를 쏘아보았다. 적어도 나는 편하게 서울에서 살고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런 뒤 길게 이어지는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살아남아 기필코 정상에 우뚝 설 그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쑥 나온 입을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프기로 마음먹었다」중에서
3년 전에 집을 나간 아빠, 다 큰 어른이 집 나간 게 무슨 자랑이냐 싶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빠는 평상시에 엄마와 싸우는 것도, 대책 없이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어서 난 그저 그러려니 했다. 여드름이 막 올라오던 중2 가을이었고 아빠는 별거, 진짜 별거 아니라며 여느 때처럼 짐 가방을 챙기다가 축 처진 내 어깨를 일으켜 세웠다. 그전에도 아빠는 지방에 일이 있다며 한두 달씩 집을 비운 적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이 연락이 오면 나는 집 근처나 시내 환승역 부근, 더러는 경기도 어느 도시로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와 햄버거를 먹고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만화방에서 야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보는데도 아빠는 집안일은 묻지 않았고, 나는 내 일을 말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엄마 근황을 흘렸다. 다이어트 클럽 접고 학습지 교사 하다 지금은 마트에서 일한다는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말하고도 무언가 허전하다 싶으면 ‘아빠 언제 와, 와요. 올 거지? 요.’ 더듬거리며 물었다. 때 되면, 짧게 대답하고 아빠는 일어났다. 오늘은 반년 만에 보는 건데도 마주 앉아 안부를 묻지도 못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먼 데 가서 밥값에 차비를 날리고 돌아온 건 문제도 아니었다. 점점 벌어지는 아빠와 나 사이의 틈이 예전 같지 않게 너무 커져서 당황스러울 뿐이다. 어떻게 해야 좁힐 수 있을까?
---「완주의 끝」중에서
강욱이는 엄마가 학원 앞에 내려 주면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떠나는 걸 본 뒤 뒷문으로 나와 문구점을 찾아 들어갔다. 지난번에 갔던 문구점은 피했다. 항상 새로운 문구점이었다. 강욱이는 볼펜, 샤프, 수정액, 붓, 이어폰, 두툼한 다이어리 따위를 집었다. 필요하거나 갖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날그날의 기분대로 물건은 강욱의 손에 잡혔고, 심호흡까지는 아니어도 침을 한 번 삼킨 뒤 물건이 사라지는 마법을 부렸다. 강욱이는 마법사가 되었다.
주머니는 수색의 위험이 있어 피했다. 셔츠 안이나 바지 안, 양말 안쪽, 운동화. 그렇게 숨겨 온 물건들을 학원 강의실에 버렸다. 엄마에게 귀찮은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책상이나 서랍에 넣어 둔 물건을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은 대체로 빅버거였다. 무언가를 살피는 데는 가히 천부적이었다. 빅버거는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이 가질지, 데스크에 갖다줄지를 고민했다. 그때마다 빼빼로는 옆에서 조언했다. 볼펜이나 수정액은 데스크에 가져가 봐야 주인을 찾을 수 없을 테니 그냥 필통에 넣어 두라나? 다이어리 같은 건 자기한테 넘기는 게 좋을 거라고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빼빼로는 옆에서 거드는 척 자기 것도 챙길 줄 아는 실속파였다.
강욱이가 훔친 물건은 결국 빅버거나 빼빼로 것이 되었다. 강욱이는 이 구조도 꽤 재밌었다. 자신이 훔친 물건을 친구 둘이 사이좋게 나눠 갖는다! 빅버거나 빼빼로는 강욱이와 공범 아닌 공범이 되었다. 강욱이는 훔치는 행위를 그만둘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대담해지고, 실행한 후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문구점을 순회하는 그 순간이 마법의 시간이자 시들한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 같았다. 가슴이 어느 때보다도 더 힘차게 요동쳤다.
---「구슬 감추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