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상해! 오빠는 입양했으면서 왜 안 된대. 오빠가 얼마나 착하고 얌전한데 왜 엄마는 매번 화내?”
“옛말에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어. 그게 괜히 있는 줄 알아? 아무리 편견이 없어야 한다지만 사람 타고난 환경은 어디 안 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은서는 화가 나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오빠가 왜 짐승이야?! 오빠는 사람이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가 트집 잡아도 아무 말 안 하잖아!! 그렇게 따지면 엄마 책임이지. 엄마가 입양해 키웠으니까!”
--- p.27
“와, 엄마 진짜 치사하다. 어떻게 사람 생명을 내걸 수 있어?”
“생명이라니? 대학 돈이 어떻게 생명이 돼.”
“돈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하잖아. 오빠 굶어죽으라는 거잖아.”
--- p.64
아빠는 기특하다며 사는 김에 대학생이 된 아들 몫도 사주었다. 중고로 사면 된다고 몇 번이나 거절하는 그에게 ‘오랜만에 아빠 노릇 좀 하게 해달라.’는데 뭐라 할 말이 없어 결국 받았다. 침착하자는 이성과 달리 새하얀 구름이 마음 어딘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 해 은별은 몇 번이고 노트북을 꺼내 이리저리 보다 넣기를 반복했다.
--- p.84
오빠가 친아들이었어도 그랬을까? 아니, 친아들이었으면 엄마는 그냥 한숨 쉬고 말았을 거야. 한숨 쉬면서, 첫째가 동생을 질투하는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겠지. 그게 화가 나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 결국 오빠는 친아들이 아니라 데려온 아이였다는 거잖아.
--- p.126
솔직히 말할게. 나는 고아에 대한 어떤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 불쌍하다든가 눈치를 본다든가 애정을 갈구한다 같은. 그래서 네가 은서 목을 졸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배신당한 기분이었어. 마냥 착하고 순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은별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어쩌면 동생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이래서 고아를 그렇게 차별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 p.129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그 소리잖아. 근데 따지고 보면 같은 사람이니까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걸 왜 감성에 호소해? 이상해.”
“사람은 감정적인 존재라서 그래. 엄마도 너 때는 세상이 이해가 안 됐어. 좀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 p.161
그 한가운데서 역할에 충실한 여름은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잘 모르는 사람들 중 아는 얼굴이라 그렇겠지만 운해 눈에는 그녀만 보였다. 발자국 하나, 호흡 하나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동시에 그는 침울해졌다.
--- p.213
“어제 SNS 돌아다니다가 그거 봤는데 반응이 정말 좋아요. ‘아이돌지망생이 시각장애인이 되면 벌어지는 일’이라는 제목인데 좋아요 수가 너무 많아서 알고리즘에 뜰 정도예요. 저도 메인에 떠서 봤어요.”
--- p.247
그 때 도망치지 말고 끝까지 버텼어야 했어. 내 마음 편해지자고 경찰하겠다 순종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싸워 이겨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쯤 이런 꼴은 아니었을 텐데.
--- p.267
“운해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주에 한두 번씩 봉사하며 엄마 분식집 도우며 계속 살았을 거예요. 연극에 데려다준 것도, 은하 씨 찾는 데 참여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노래방에 가게 된 것도, 그래서 지금 쇼핑몰 모델이 되기까지 전부 운해 씨 덕분이에요.”
“저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여름 씨잖아요. 친구하자고 먼저 다가온 쪽도 여름 씨고요. 저는 보조했을 뿐 결국 스스로 이루신 거죠.”
“제가 운해 씨에게만 말을 걸었을까요?”
--- p.271
비만을 옛날과 지금 다르게 인식하듯이 장애인, 범죄자, 성소수자, 싸이코패스는 옛날 옛적부터 있었고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만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그녀 의견대로 물자의 풍부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데 어련할까. 그렇다면 나처럼 팔다리 멀쩡한 고학력 백수 청년은 이 시대에 어떤 존재일까.
--- p.285
운해는 방금 처음 들었고 앞으로 겪을 확률도 희박한 세상을 경청했다. 장애인, 전과자, 봉사자, 비리 경찰관에 경찰 공시생까지, 같은 하늘 아래 모두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사는 세계’란 육체 공간과 정신 공간이 분리되어 보이지 않는 계급 아래 평생을 사는 곳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