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몽고메리의 기타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사람의 연주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고 느꼈다. 톤이며 주법이며가 정말 신선함 그 자체였다. 그것도 고생고생 머리로 생각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어딘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샘솟는 듯한 넉넉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야, 이거 굉장하군”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웨스 몽고메리의 연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감탄할 만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자연아적 매력은 역시 라이브 판인 “Full House”에 가장 좋은 형태로 담겨 있다. 자니 그리핀의 뜨겁고 군더더기 없는 테너 색소폰의 도움 덕에 실로 그 매력이 흘러넘칠 정도이다. 윈튼 켈리 트리오와 같이 작업한 “Smokin' at the Half Note”도 스윙기한 뛰아난 앨범이지만, 오래 듣다보면 켈리와 웨스의 얽힘에 귀가 거슬리기도 한다. 두 사람 각자의 특징적인 스타일이 군데군데에서 중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 그리핀과 웨스의 합작에는 좋은 의미에서의 '나눔'이 있다. 단단하게 주루른 주먹밥처럼 하드보일드한 그리핀의 테너 톤과, 적당히 달콤하며 깊고 풍부한 웨스의 사운드가 마침 알맞게 뒤얽히고 퉁겨내고 서로를 자극한다. 여기에서도 켈리가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그가 사이드 맨의 역할에 충실하 때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 분위기가 황홀하다.
그러나 웨스는 독자적인 연주 스타일을 확립하여 간판을 내걸 수 있는 스타 플레이어가 되고부터는 혼 주자와 함께 연주한 일이 거의 없다. 데뷔후 한동안은 애덜리 형제나 해롤드 랜드와 같이 연주한 앨범을 몇 장 내놓았는데, 자신의 캄보 밴드와 연주한 앨범에서 혼 주자를 내세우기는 이 “풀 하우스” 한 장뿐이다. 오히려 오르간 주자를 영입하거나 빅 밴드를 백에 배치하는 일이 많아졌다. 아마도 음의 구사 방식이 점차 두텁고 대범해져서 타인의 솔로에서 백을 담당하기가 다소 부자유스러워졌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핀과의 연주에서 볼 수 있는 혼과 기타의 멋진 하모니나 여유만만하고 조심스러운 반주는 듣다보면 가슴이 뛴다. 가능하다면 이런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싶었다.
지미 스미스와 함게 한 호화로운 연주도 즐겁고, CTI 노선도 완성도가 뛰어나다. 나는 그런 앨범을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배체할 마음이 없고 실제로 즐겨 듣기도 한다. 그러나 경력이 후반으로 접어들면 들수록 웨스의 연주 역시 과연 예정 조화적인 색채가 짙어지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정도로 그릇이 크고 품이 얺은 연주가이니, 연주 인생의 어딘가에서 스릴이 넘치는 재즈 앨범을 녹음했어도 좋았을 텐데 하고 나는 생각한다. 하기야, 뭐, 그런 자잘한 부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소위 자연아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책에 따르면, 그는 1961년경 미국 서해안에서 존 콜트레인과 몇번 같이 연주한 적이 있다는데, 그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안타깝다. 과연 어떤 연주를 했을까? 꼭 듣고 싶군요.
--- pp.30~32
모던 재즈 사중주단
-역설적으로 말하면, MJQ 유니트의 강력함은 그 유니트의 파탄성속에 있었다. 이 점은 그들이 무대에서 연주하는 정경을 직접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른 세 사람은 설정된 집단적인 사운드를 반듯하게 유지하는데, 비브라폰 주자인 밀트 잭슨은 솔로 도중에 그 형식적인 스타일을 견디지 못하고, 윗도리를 휙 벗어던지고 넥타이를 풀어헤치고-물론 비유적인 의미로-개인적으로
유유히 스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어도 나머지 세사람은 '나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담담하고(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무표정하게 MJQ적인 리듬을 유지한다.하고 싶은 연주를 다하고 나면 잭슨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윗도리를 반듯하게 입고 넥타이를 조인다. 그 반복이다.
--- 본문 중에서
1960년대 후반의 “농밀했던” 재즈계에서 “처녀 항해Maiden Voyage”의 스마트한 앨범 재킷과 미래 지향적이며 청신한 사운드는 젊은 재즈 팬들의 마음에 선명한 각인을 남겼다. 마치 오랫동안 꽉 닫혀 있었던 집의 창문을 누군가의 손이 활짝 열어젖힌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핸콕은 이후 재즈의 최전방에서 활약했고, 때로는 시대를 리더하는 훌륭한 작품을 상당수 발표했는데, 발표 당시 이 LP가 우리들에게 선물했던 싱그러운 숨결을 넘어선 무엇이 거기에 있었던가 하면 막상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의이름을 내세운 많은 레코드들이 선을 보였지만,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앨범은 솔직히 거의 없었다.
핸콕은 제로에서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음악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스타일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유형의 음악가였다. 나름대로 미래 지향적이고 혁신적이기는 하되, 그렇다고 스스로 앞장 서서 광원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인력권 속에 있을 때에는 마일스가 발산하는 강렬한 혁신성에 정면으로 호응하고 또 때로는 대항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선열한 연주를 했지만, 그 태양의 열량이 감소하면서 핸콕의 음악의 방향성도 점차 산만해졌다. 연주 자체의 질은 높아도 군데군데 틀에 틈이 생기고 손버릇만 신경에 거슬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다소 비판적으로 쓰기는 했으나, 블루 노트 시대의 발랄하고 스타일리쉬한 핸콕의 연주는 지금 들어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으니, 그가 융통성있는 감각과 재능을 지닌 일급 뮤지션이었음을 새삼 말해준다.그에게는 아마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대였을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음악을 그대로 음으로 바꾸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때 음악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났을 것이다. “처녀 항해”를 들으면, 그런 낙원 같은 모습이 알알이 전해온다.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 오중주단에서는 중진인 마일스와 웨인 쇼터가 빠지고 젊은 프레디 허바드와 조지 콜맨이 참가했다. 이렇게 멤버만 바뀌었는데도, 이 리듬 트리오는 실로 느긋하고 가볍게 연주를 즐길 수 있었다. 음 하나하나에 부드러움과 환희와 자신감이 충분했다. 핸콕이나 다른 뮤지션들이나 모두 젊어, 잃을 것이 아직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미래는 그들 앞에 활짝 열려 있었다.
이 레코드를 들으면 당시의 재즈 카페의 풍경이 떠오른다. 결국,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누군가가 손을 뻗어 그 창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좀처럼 차운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리기는 했는데, 그 안쪽에 벽이 또 버티고 있는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처녀항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였다. 그들이 열어준 것은 진짜 창문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진짜 공기였다. 간혹 그런 음악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처럼 우리들 마음속에서 언제까지고 빛을 잃지 않는다.
--- pp.8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