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권 구축을 위해 평양을 새 도읍지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내륙 깊숙이 박혀 있는 국내성과 달리 평양은 교통의 요지로 한반도와 대륙을 동시에 아우르는 입지에 있다. (…) 수도천도가 기존세력의 타격과 신진세력의 기반 다지기라는 것은 고려에서의 몇차례에 걸친 평양천도 시도와 조선의 한양천도와 맥을 같이하다. (…)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백제와 신라는 공동의 대응도 마다하지 않으며 고구려에 고슴도치처럼 저항하는 형세가 돼버린 것이다. 고구려는 대륙으로 뻗어가는 힘에 집중하지 못하고 한강유역을 둘러싼 지리멸렬한 싸움에 국력을 소진하게 된다. (…)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귀족대신세력에 대한 견제 역시 장수왕 사후에는 귀족세력의 파워가 왕권을 능가하는 형세로 전개됐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한반도 역사를 바꾼 평양천도」
--- pp.44~45
발해를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로 당시 발해와 통일신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발해와 통일신라가 대립 갈등하면서도 한민족으로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해석할 만한 증거는 많다. 양국은 당이 외국인을 위해 설치했던 빈공과의 수석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당이 양국의 외교서열을 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전을 벌였는데, 이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삼한’의 적자가 어느 나라인가를 놓고 경쟁했음을 보여주는 일례들이다.
―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 p. 82
신문고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그리 쉽사리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었다. (…)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은 먼저 해당 관청에 호소했다가 거기서 해결이 안 되면 사헌부를 거쳐야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신문고를 칠 때도 담당 관리에게 억울한 내용을 진술하고, 사는 곳을 확인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치더라도 담당 관리가 위에 보고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러니 지방에 사는 백성이 한양까지 올라와 신문고를 치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 「정말 신문고만 치면 됐나?」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