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공동서신 전체를 총괄할만한, 그러니까 ‘공동서신의 신학’이라 부를만한 신학적 통일성도 있는가? ‘공동서신의 새 관점’을 제시하면서 주로 문학적, 신학적 통일성에 주목한 Wall은 만일 야고보서가 공동서신 전체의 도입(introduction)부 역할을 한다면, 야고보서에서 두드러진 주제들이 그 이후 공동서신의 다른 책들에서도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이 ‘핵심 주제들’이 공동서신을 하나로 묶는 신학적 주제들의 고리 역할을 하는데, 그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추려낸다: (i) 인간적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공동체의 사랑을 시험한다. (ii) 하나님 백성의 고난에 대한 응답으로써, 하나님은 구원의 유일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신다. (iii) 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친구’ 된 표지인 순전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행실을 견지’해야 한다. (iv) 신학적 정통성은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일에 결정적이지 않다. 그 신앙 고백이 오직 사랑의 행위들로 표현되어 나올 때만 효력을 갖는다. (v)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에 대한 상급은 영원한 삶, 곧 영생이다.
---「제1장 서론│1. 주제의 제안과 최근의 공동서신 연구 동향」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동서신의 배경이 되는 ‘세상’이 대체로 ‘적대적’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교회 역시 대체로 ‘세상 부인적(world-denying ethos) 정서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곳은 가난한 자들이 핍박을 받는 곳이며(약 2:1-7), 허망한 부의 유혹이 사람들을 죄와 사망으로 몰고 가는 장소이다(약 4:1-4; 2:12-15). 혹은 하나님의 집에 속한 자들을 소외(alineation)시키며(벧전 1:1, 11), 교회가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성향과 방향을 가진 장소이다(벧전 4:1-6). 불경건의 소굴이고, 심판의 대상이다(벧후 2:1-5; 3:1-6; 유 13-15절). 마침내, 그곳은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어둠과 거짓, 미움과 사망의 처소이다(요일 2:15-17; 3:13-14; 4:1-6). 이렇듯, 공동서신의 배경이 되는 ‘세상’은 공동서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공동서신의 배경으로 추정되는 세상이 아니라, 공동서신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제1장 서론│2. 공동서신의 주제로서 ‘세상 속의 교회’」중에서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교회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영역들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 원리와 의미, 그리고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서신이다. 예컨대, 국가 안에서 ‘세상 주권자들과의 관계’(2:13-17), 집안에서 ‘종과 주인과의 관계’(2:18-20),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3:1-6),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장로들과 젊은 자들과의 관계’(5:1-5a)에 대한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베드로전서의 이런 본문들은, 특히 ‘순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와 함께 나타나는데, 그 배경으로는 신약의 다른 유사한 본문들과 함께(엡 5:21-6:9; 골 3:18-4:1; 딛 2:1-10)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이론이 제시되어 왔다. 첫째는 순복에 관한 이런 요구들은 성도가 교회에 입문하는 세례 시에 주어지는 ‘순복 규율’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그보다는 당시 로마 사회의 공식적인 ‘집안 내부 규율’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고, 마지막으로 보다 일반적으로 그레코로만 사회의 ‘집안 경영’의 윤리적 전통이나 종종 이와 관련된 시민 사회의 영역(politeia)에서의 규범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이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들 가운데 어떤 것이 베드로전서의 경우를 더 잘 반영하는지 살펴보면서, 교회가 속한 사회의 각 영역들에서 베드로전서가 강조하는 원리의 특징들을 확인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제3장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세상 속의 교회’│3. 세상과 ‘선한 양심’(2:11-3:22)」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베드로가 거짓 교사들의 교리적, 윤리적, 그리고 성경 해석에 관련된 거짓과 부패와 오류들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문제 상황에서, 그 해법을 단순히 교리를 바로잡거나, 윤리적 교훈을 주거나, 성경 해석에 관한 강론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아가며’ 그 알아가는 표시로서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영적, 존재적, 전인격적 변화를 결정적인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여기서 성경적 우주론과 종말론이 어떻게 신앙과 윤리와 뗄 수 없이 연결되는지가 드러나는데, 베드로는 전서와 후서에서 모두 세상의 특징을 세 가지로 ‘썩어지고, 더럽고, 쇠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베드로전서 1:4에 요약되어 제시된 이 세 가지 특징은, 흥미롭게도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나씩 서신의 전개에 따라 펼쳐진다. 교회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 성품에 참여해야 하고, ‘더러운’ 정욕을 따라 거짓된 자유를 약속하며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별해야 하며, ‘옛 세상’ 혹은 ‘그때의 세상’처럼 지금도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일시적’인 현재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졌고 보존되고 또한 심판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나라로 갱신될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제4장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교회 속의 세상’│5. 결론 - 거짓 가르침과 신적 성품」중에서
‘아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요한서신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은 그 아들이 세상에 ‘이미 오셨다’는 사실이다(1:1-3). 그리고 그의 오심은 종말론적이다. 즉 그의 오심의 결과로 세상은 ‘사라지고 있다’(2:17). 이것이 교회가 처한 세상에 대해 요한일서가 선포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그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요한은 그 아들이, 요한복음에서처럼, ‘태초부터 있는 말씀’ 또는 ‘생명의 말씀’,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한다(1:1-2). 그리고 이제 그 아들을 믿음으로 그 아들과 그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와의 사귐 가운데 거하라고 권면한다. 그것이 그 아들이 오심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세상 안에서 교회가 취해야 할 가장 중대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실에 대한 설명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에 비해(1-12장), 요한서신은 그 아들의 오심으로 그 사건에 근거한 그 아들의 복음을 통해 생긴 공동체가 세상 안에서 그 영원한 생명의 사귐 가운데 거할 것을 더욱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요한복음 13-21장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과정을 서술한다고 할 수 있다면, 요한서신은 그렇게 세상에 보내어진 교회가 어떻게 그 사귐 가운데 거함으로써 세상의 거짓과 죄, 불의와 증오, 그리고 우상 숭배와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역설하는 셈이다.
---「제5장 요한서신에 나타난 ‘세상을 이기는 교회’│2. ‘사귐’의 해법(1): ‘그 아들’과 세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