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방이 그리는 한국 미술의 미래
이 책에는 권기수·김동범·김준·데비한·배종헌·배준성·손동현·윤석남·이동재·이영섭 등 10인의 미술가가 등장합니다. 필자가 이 분들을 섭외한 가장 큰 이유는, 국내는 물론 해외비평의 힘도 얻을 수 있는 작가들이기 때문입니다. 권기수, 데비한, 배준성 등, 이미 여러 작가들이 해외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해외비평의 힘입니다. 한국 미술이 세계 미술사 안으로 진입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특징과 배경, 사상과 의미를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 비평이 꾸준히 생산되어야 합니다. 『예술가의 방』은 이를 위한 작은 밑거름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양성입니다. 현대미술에서 구상/비구상, 서양화/동양화, 평면/입체 같은 전통적 구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미술교육은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예술가들을 통해, 무한히 시험하는 현대미술의 합종연횡의 현장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10인의 작가들 중에는 동양화를 배운 이도 있고, 만화를 그리는 이도, 조각을 하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배우고 어디서 출발했든 그들의 현재는 이미 그 모든 경계를 넘어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열 명의 방에서 현대미술이 어떻게 창조되고 확대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공간, 닮은 고민
그림과 사진으로 복원한 ‘예술가의 방’을 보면 제일 먼저 그 다름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10인의 작품이 다른 만큼 그들의 공간도 너무나 다릅니다.
만 개의 쌀이 만든 디지털 초상 이동재의 방__하얗고 깔끔한 작업실
소심한 동구리의 거침없는 질주 권기수의 방__석유난로 두 개가 있는 카센터 위 사무실
이 세상 모든 어미들의 눈물을 닦아 주다 윤석남의 방__어둡고 썰렁한 컨테이너
인생을 그리는 카투니스트 김동범의 방__남의 사무실에 빌린 쪽방
이 시대가 당신의 몸에 새긴 문신들 김준의 방__빨강 커튼이 돋보이는 맨하튼풍 작업실
화가는 입히고 관객은 벗긴다, 변신하는 캔버스 배준성의 방__근사한 이층집과 냄새나는 지하방
번개머리 여전사 비너스에 도전하다데비한의 방__월세집과 빌린 가마 공방
나는 거꾸로 조각한다이영섭의 방__그리스풍 집과 살풍경한 연구실
한국화의 즐거운 진화손동현의 방__긴 계단 끝에 선 서민아파트
생각이 작품이다배종헌의 방__옥상 텃밭을 옵션으로 낀 낡은 전셋집
그런데 놀라운 것은 또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공간에서 다른 색깔의 작품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일 관심 있는 건 뭔지요?”
“돈이요! 작품이 심오하면 뭐해요? 버틸 수 없으면. 사실 생각하는 작업들이 몇 개 있는데 이 공간에서는 소화가 안 돼요. 크기하고 무게 때문에요. 작업이 굉장히 큰 것들, 풍선 작업 같은 것, 철로 만든 것들을 아주 크게 해서 시청 앞 같은 곳에 설치하고 싶은데….” (권기수 66p)
“제가 지금 교수로 강단에 서지만 대학을 나가도 사실 생활이 힘들어요. 솔직히 작가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제일 많이 고민해요. 그림만 그려서는 정말 살기 힘들고요. 아시다시피, 했다 하면 안 팔리는 게 제 작품이다 보니…(웃음) 윤희 씨랑도 얘기했지만 마흔다섯 살에는 작품을 그만두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작품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정신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육체적으로도 힘들어서 전시할 때마다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겨요.”(배종헌 302p)
“서른 살 때부터 6년 동안 학원원장도 하고 대학강사도 했으니, 집에 오면 새벽 두 시고, 입시미술이니까 또 아침 일곱 시까지 애들 가르치러 나가야 되는 거야. 정말 힘들었어. 나중에 수술한 뒤, 실력을 보여줘야 되잖아. 정말 열심히 작품에만 몰두했어. 아트페어라는 게 참 냉정해. 딱 5일 하는데 반응이 없으면 잘리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아트페어 기간에 나는 근처에 가서 탁구나 치고 그랬다니까, 뭘 몰랐으니까. 원래는 부스에 가서 붙어 있어야 되는데… 예전에는 화랑들이 지역주의적인 활동을 했다면 이제는 점점 국제적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일종의 파워게임으로 바뀌고 있거든. 그래서 내가 해외 아트시장에 관해서는 책을 통해 혼자 공부하면서 익혔다니까. 아직도 공부할 게 정말 많아.”(배준성 175p)
작가들은, 상상하는 작품을 감당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좌절하고, 예술가를 키우기보다 예술을 소비하는 데 급급한 일부 콜렉터와 미술시장에 절망합니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미술가들임에도 여전히 생계를 걱정하며 하고픈 작품을 마음껏 할 수 없는 현실. 『예술가의 방』에서 만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좌절과 절망을 토로하면서도 우리의 예술가들은 여전히 씩씩하고 투지에 넘칩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키만 한 통나무를 자르고 깎아 1,125마리의 나무 개를 만드는 윤석남, 만성 어깨결림과 허리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수만 개의 쌀알을 고르고 붙이는 이동재, 바람만 불어도 넘어갈 것 같은 가녀린 몸으로 커다란 청자 비너스를 만들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데비한. 그들의 눈은 자신의 예술을 말할 때 가장 빛납니다. 가난과 실패가 구석구석 깃든 예술가의 방에서 승리자는 예술가 자신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지요.
사진과 일러스트, 풍부한 도판으로 복원한 예술가의 방
『예술가의 방』은 독자가 직접 예술가를 만나고 그의 방을 둘러본 것 같은 현장감을 주기 위해 사진과 일러스트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작업실 구석구석을 찍은 사진들은 예술가의 추억과 일상의 사연까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하나의 작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작업 과정을 찍은 사진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작가의 아이디어가 담긴 스케치 사진들을 통해 완성된 작품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예술가들의 개성을 살린 섬세한 일러스트를 실어서 보는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사진으로는 담기 힘든 집 구조도와 방의 부감도를 그린 일러스트는, 보는 재미와 함께 사실성도 느끼게 합니다.
이 책의 또 한 가지 특징은 10인의 미술가들의 작품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미술가들이 직접 제공한 도판들은, 그들의 예술세계로 다가가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책을 마무리할 즈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천 마리가 넘는 개들을 전시할 공간이 있을까 걱정하던 윤석남이 전시장을 잡고 가을에 전시를 할 거란 소식이었습니다. 지난 5월엔 데비한이 자개와 나전칠기를 활용한 새로운 비너스 시리즈로 전시를 열었습니다. 개막일인데도 작품들 옆에는 빨간 딱지가 여럿 붙어 있더군요. 또 권기수와 김준이 함께 참여한 전시가 있어 책에서의 인연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그들의 소식에 함께 기뻐하며 작은 소망 하나를 가졌습니다. 부지런한 예술가들이 작품 외에 다른 일로 마음 쓰고 상처받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소망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