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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을 펴내며
한국어판을 펴내며 프롤로그 |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 Ⅰ. 죽음을 생각하는 날: 런던 2001년 12월 마르크스의 무덤 | 자폭하는 세계 | 프리모 레비 | 자폭의 일상화 | 11층의 창 | 우리 망명자들 | 일본인의 마음 | 사자의 국민화 | 불사의 공동체 | 파르지팔 | 성배의 민족 Ⅱ. 폭력의 기억: 광주 1990년 3월, 2000년 5월 망월동 | 어떤 누나 | 풀 덮인 무덤 | 광주여 영원히! | 비엔날레 | 나는 누구인가 | 시린 네샤트 | 붉은 하이힐 | 넓은 바다로 | 침목 | 맨홀 | 재일의 인권전 | 활자구 Ⅲ. 거대한 일그러짐: 카셀 2002년 8월 아웃 오브 블루 | 도쿠멘타 | 싫은 느낌 | 이중의 디아스포라 | 아름다운 열대 풍경 Ⅳ. 추방당한 자들 1. 난민의 자화상: 브뤼셀, 오스나브뤼크 2002년 5월 브레인동크 요새 | 오스나브뤼크 | 난민의 삶 | 죽음의 벽 | 망명자의 자화상 2. 어제의 세계: 잘츠부르크 2002년 여름, 2004년 여름 다나에의 사랑 | 어제의 세계 | 종이와 스탬프 | 죽음의 도시 3. 세 사람의 유대인 강제와 불가능성 | 문화로부터 추방당하다 | 오직 언어를 모국어로 삼아 | 티에의 묘지 에필로그 | 코리안 디아스포라 아트 |
저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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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면서 곳곳이 파괴되고 방대한 희생자, 난민을 낳았지만 전쟁 종식은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제2차세계대전의 국제 질서를 그럭저럭 떠받쳐오던 유엔은 완전히 기능 부전 상태에 빠졌다. 핵무기 사용까지 현실화하는 느낌이 든다. 고향에서 쫓겨나 거처를 잃은 사람들의 고뇌는 점점 깊어진다. 디아스포라에게 지금은 실로 혹독한 ‘한겨울’이다. 유럽에서도, 혹은 우리가 사는 동아시아에서도, 수십 년간 봉인되어왔던 핵무기가 사용될 날이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예감마저 든다.
(…) 디아스포라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그들이 국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꾸로 말하면, 국가 없는 세계에 대한 희망(감히 ‘희망’이라 말해두자)을 잉태할 보편적 사상이 그들로부터 펼쳐질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이것이 제2차세계대전 후의 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할 ‘희망’이었지만, 이 ‘희망’은 지금 크게 위협받고 있다.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들은 여전히 기나긴 고난의 길을 걷는 중이다. --- p.7-9, 「개정판을 펴내며」 중에서 그런 시도를 한 이유는 프리모 레비, 파울 첼란, 장 아메리, 슈테판 츠바이크 등 이 책에서도 다룬 유럽 유대계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의 사색에 강하게 끌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펼친 사상적 행위에는 유대인이라는 좁은 범위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전 세계 많은 이(여기에는 물론 우리 ‘조선 민족’도 포함되어 있다)가 숙고해야만 할 보편적인 호소와 교훈이 담겨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다 긴 척도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사색을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 --- p.9-10, 「개정판을 펴내며」 중에서 이 책에서는 디아스포라를 이해하고자 글로 쓴 텍스트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작품에도 눈을 돌렸다. 디아스포라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로 된 텍스트에만 의거할 것이 아니라, 비문자 텍스트에 자극받은 상상력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제목에 ‘기행’을 붙이고, 대상을 관찰하여 서술하는 작가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유동하는 상태로 두는 것, 아울러 많은 예술 작품을 참조하며, 말하자면 작품들과 대화를 통해 서술해나가는 형식을 선택한 것 또한 지금까지 이야기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했다. --- p.10-11, 「개정판을 펴내며」 중에서 고정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도 그것을 보는 쪽이 불안정하게 움직일 때는 달리 보인다.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소수자의 눈에는 보인다. 이 글은 ‘나’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 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려 한 시도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의 모습이 근대 특유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 p.27, 「프롤로그」 중에서 |
경계에서 사유하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여정
평화가 위협받는 세계에서 지금 다시, 서경식을 읽어야 하는 이유 서경식은 익히 알려져 있듯 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다. 1971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형 서승, 서준식의 구명 활동에 뛰어들며 한국 민주화 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때의 체험은 이후 그의 저술 활동에 근간이 되었고, 재일조선인이자 디아스포라라는 소수자의 관점으로 사유하는 글들을 써왔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서경식이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며 ‘근대’를 사유하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한 인문 에세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한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유의 폭을 확장하며 개념을 새롭게 ‘탈구축’한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의 탈구축을 시도할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문자 텍스트를 포함해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까지 시선을 넓힌다. 아울러 ‘기행’(紀行)이라는 형식을 도입해 대상에 대해 서술하는 작가 자신을 유동하는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한 사회에서 이방인이자 소수자로 산다는 것, 재일조선인으로서 과거에 자기 민족을 지배한 자의 언어를 모어(母語)로 삼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은 왜 남들과 다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경계에서 사유하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서 그의 여정은 몇 겹의 소수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진실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불안한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는 ‘추방당한’ 이들의 초상(肖像)을 그리는 서경식의 문장은 현대사의 질곡을 대면해온 그의 삶과 어우러져 더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무력(武力)이 희망을 위협하는 시대에, 무력(無力)한 이들의 희망을 사유하다 타의에 의해 ‘밖’에 자리하게 된 사람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주어진 조건으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그 아픔을 모르고 살아온 다수자들에게 반성과 성찰을 요청한다. 서경식은 경계에 선 디아스포라의 삶을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핍진히 그려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디아스포라의 상처가 단지 ‘그들’만의 아픔일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타자의 고통을 무딘 공감의 말로 가로채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고자 한 걸음 바투 다가선다. 그렇기에 독자 역시 그의 글을 읽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서경식’이라는 한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눈으로 마주한 세계에 공명할 수 있게 된다. 초판에서 개정판 출간에 이르기까지, 국제 사회의 평화는 여전히 아득하지만, 그사이 디아스포라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이해는 다소간 진전된 바가 있다. 변화한 것과 변치 않은 것 사이에서 다시 읽는 『디아스포라 기행』이 새롭게 던질 파동에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서경식의 저작을 아껴 읽어온 오랜 애독자들은 물론, 개정판을 통해 그의 사유를 처음 조우하는 다음 세대 독자들의 반향에 사뭇 기대를 걸게 된다. 책의 본문에서 서경식은 1958년 파울 첼란의 브레멘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을 인용하며 ‘투담통신’(投?通信)의 비유를 소개한다. “편지를 넣은 병을 바닷속에 던지듯 낯선 땅 미래의 독자에게 전달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속에서 시도하는 통신이라는 의미”(259~260면)다. 그는 첼란의 이 말을 에세이 『디아스포라의 눈』(한겨레출판 2012)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예컨대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흘려보내는 것과 같은, 또는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다.”(『디아스포라의 눈』, 274면)라고 되새긴 바 있다. 초로에 접어든 한 디아스포라 지식인이 ‘고통’과 ‘기억’의 연대를 통한 희망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듯 쓴 투담통신이 다시 한번 우리 앞에 당도했다. 이제 당신이 그 절박한 편지를 펼쳐볼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