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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중고도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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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75쪽 | 328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2810022
ISBN10 8982810021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약간 있으나, 대체적으로 손상 없는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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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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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게 인생일까. K는 생각한다. 어차피 패는 처음에 정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끗쯤 되는 별 볼일 없는 것이었으리라.세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적당히 좋은 패를 가진 자들이 허세에 놀라 죽어 주거나 아니면 두끗이나 한끗짜리 판에 끼게 되거나. 그 둘중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세끗이라도 좋다. 승부가 결판 나는 순간까지 나는 즐길 것이다.(P.29)
--- p.
이 낭만주의적 화려함 때문에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서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하는 자가 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이다. 왕은 팔베개를 한 채로 자신의 애마와 애첩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제일 마지막에야 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화면의 구석에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육 장면들은 환하고 밝게 묘사되어 있고 게다가 살해되는 여자들은 나체이기 때문이다.
--- p.137
언젠가 화전민의 가옥, 너와집을 본 기억이 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 -너와집은 한지붕 아래에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가축의 우리와 부엌, 살림방과 난방시설, 곡식저장소까지 말이다. 그들의 아궁이에서 배출된 연기마저 쉽사리 너와집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 연기는 굴뚝을 지나서 다시 집 내부를 데운 후에야 조금씩 너와집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다. 10월부터 내리는 눈이 그들을 가두어놓은 것이다. 그러다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그들은 너와집을 뛰쳐나와서 산악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축제와 같았을 것이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산맥의 갈피마다 불꽃들이 일렁였으리라. 그러나 이 시대에는 누구도 그런 축제를 벌일 수 없다. 아무도 무료한 겨울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불을 질러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를 태워버릴 수밖에 없다. p.58
--- p.
도서관에서 나는 잡지류를 먼저 뒤적인다. 기사 중에서 가장 흥미있게 찾아보는 것은 인터뷰류이다. 운이 좋다면 그 중에서 나의 고객을 찾아낼 수 있다. 대중적이고 저열한 감수성에 물든 기자들은 내 잠재 고객의 성향을 행간에 감추어버린다 그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은 없나요?' 같은 질문을 절대로 던지지 않는다. 당연하게 '피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따위의 질문도 하지 않는다. 다비드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감상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는 인생에 대한 아무 의미 없는 언급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이 의미 없이 내뱉는 말 속에서 가능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즐겨 듣는 음악, 언뜻언뜻 내비치는 가족사, 감명 깊었다던 책, 좋아하는 화가 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내면의 충동을 드러내고 있는 싶어한다. 그들은 나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p.11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이제 이 소설을 부치고 나면 나도 이 바빌로니아를 떠날 것이다. 비엔나 여행에서처럼 그 곳에도 미미나 유디트 같은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 p.140-141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혁명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린 손은 팬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사 레퀴엠이 들려오고 이쓴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있다.

나는 이미 여러차례 그 그림을 모사해보았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라이 표정이다. 내가 그린 마라는 너무 편안해보여서 문제다. 다빋이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에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고,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이 마라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비드는 죽은 자이 표정을 통해 구현했던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마라의 얼굴에 머문다.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 p.7-8
[사르다나팔의 죽음]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한 건장한 무사가 냉정한 표정으로 몸을 한껏 젖힌 전라의 여인을 등뒤에서 껴안고 위로부터 수직으로 칼을 내리꽂고 있다. 가로 5미터, 세로 4미터의 화면은 살육의 잔치로 가득하다. 화면 왼쪽에는 왕의 애마를 끌어내는 흑인 무사의 모습이 보인다. 말도 곧 살해될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나 이 낭만주의적 화려함 때문에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서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하는 자가 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이다. 왕은 팔베개를 한 채로 자신의 애마와 애첩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제일 마지막에야 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화면의 구석에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육 장면들은 환하고 밝게 묘사되어 있고 게다가 살해되는 여자들은 나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사르다나팔 왕을 발견하게 되는 관람자들은 숨을 죽이게 마련이다.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지켜보는 왕과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대조가 이 그림의 백미이다. 이 광란의 무도회를 지켜보는 사르다나팔 왕은 들라크루아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감정이입하게 되는 인물은 들라크루아가 아닌 바로 사르다나팔이다. 멸망해가는 바빌로니아에서 죽음의 향연을 벌여야하는 비운의 왕 말이다.

같은 소재를 3류 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사르다나팔이 자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알고 있었으리라. 죽음을 주재하는 자의 내면에 대해서 말이다.
--- p.137-138
[사르다나팔의 죽음] 성도의 함락을 눈앞에 둔 바빌로니아의 왕이 무사들을 시켜 그의 왕비와 애첩들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한 건장한 무사가 냉정한 표정으로 몸을 한껏 젖힌 전라의 여인을 등뒤에서 껴안고 위로부터 수직으로 칼을 내리꽂고 있다. 가로 5미터, 세로 4미터의 화면은 살육의 잔치로 가득하다. 화면 왼쪽에는 왕의 애마를 끌어내는 흑인 무사의 모습이 보인다. 말도 곧 살해될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나 이 낭만주의적 화려함 때문에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왼쪽 상단에서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하는 자가 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이다. 왕은 팔베개를 한 채로 자신의 애마와 애첩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제일 마지막에야 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화면의 구석에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육 장면들은 환하고 밝게 묘사되어 있고 게다가 살해되는 여자들은 나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사르다나팔 왕을 발견하게 되는 관람자들은 숨을 죽이게 마련이다.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지켜보는 왕과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대조가 이 그림의 백미이다. 이 광란의 무도회를 지켜보는 사르다나팔 왕은 들라크루아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감정이입하게 되는 인물은 들라크루아가 아닌 바로 사르다나팔이다. 멸망해가는 바빌로니아에서 죽음의 향연을 벌여야하는 비운의 왕 말이다.

같은 소재를 3류 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사르다나팔이 자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알고 있었으리라. 죽음을 주재하는 자의 내면에 대해서 말이다.
---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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