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향긋한 그 상자,
감정종합선물세트에 담긴 이야기 다섯 개
단비는 침대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는 중이다. 갓 튀긴 팝콘을 한 주먹씩 입에 털어넣으며 한참 신 나게 웃고 있는데, 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짜증을 내며 현관으로 향한 단비를 기다린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작은 상자 한 개. ‘태양초등학교 5학년 정단비’라고 또렷하게 적혀 있지만 보낸 사람 이름은 없다. 단비는 누가 몰래 보낸 선물일까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빨간 리본을 잡아당긴다.
“리본이 스르르 풀리면서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상자 안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와 단비의 얼굴을 간질였다. 바람에서 향긋한 장미 향이 나더니 어느새 쌉싸래하고 달콤한 초콜릿 향으로 바뀌었다. 매콤한 계피 향이 나는 듯하더니, 시원한 박하 향이 여운으로 남았다. (…) 그런데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심장이 요란하게 요동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지고……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가, 가슴속에 뭔가 뜨거운 기분이 차오르더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12p
단비에게 배달된 것은 ‘감정종합선물세트’라는 이름의 상자이다. 상자에는 깨알 같은 글자로 이 상자를 여는 순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들을 맛보게 될 거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동화작가 김리리가 새로 펴낸 이번 단편집에는 이처럼 가슴속에 어떤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시기 아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 낸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천방지축 꼬마처럼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 기분, 누군가 눈에 들어오고, 예뻐지고 싶고, 어쩐지 쓸쓸하기도 하고, 가장 편한 가족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의 파고를 겪어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아이들의 온몸을 통과하는 그 바람은 어떤 색깔일까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는 서서히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고요하지만 세찬 회오리가 담겨 있다.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안의 욕망과 마주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수반한다. 진정한 자아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의 어긋남, 자기와의 다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색색 알사탕처럼 섞여 있는 이 상자는 예쁘고 달콤하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화가 나오미양은 다섯 편의 이야기마다 어울리는 콘셉트로 다양한 감정의 결을 표현해 냈다. 다채로운 색 톤과 카툰 풍의 드로잉이 사랑스럽다.
쿠르륵! 이상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_감정종합선물세트
어느 날 단비에게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말을 건다. 자신을 ‘선물’이라고 부르라는 그 목소리는 단비에게 꼴이 그게 뭐냐, 언제까지 가족들이 너를 애 취급 하게 내버려 둘 거냐, 잔소리만 늘어놓는다. 어느 날 같은 반 민기를 본 선물이 쿠르륵, 배 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낸다. 갸름한 턱선, 촉촉한 눈빛, 민기를 점찍었다나?
나는 공주다. 다들 그렇게 부른다. 그래서 행복하냐고? 전혀. _돼지 공(은)주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때부터 내려오는 옥가락지는 뱅글뱅글 돌리면 반지 낀 사람이 예쁘게 보이는 마법의 반지였다! 만날 돼지공주라고 놀림만 받던 은주라서 이제는 세상이 핑크빛일 줄만 알았다. 그러나 반지의 비밀을 알고 있던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욱 고민스럽다. 진정한 사랑만이 공주를 구원하리!
너를 보고 있으면 네가 진짜 박종만 같아. 난 그림자 같고. _대한민국 초딩으로 살아가기
박종만은 날마다 그렇게 의자에만 앉아 있을 거면 자신을 독립하게 해 달라는 그림자의 청을 들어준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 옥상에 올라가 어려운 주문까지 외워 가면서 말이다. 자유를 갖게 된 그림자는 매일 밤 바깥에서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들고 온다. 박종만은 그런 그림자가 부럽다. 밤늦게까지 시험 공부를 하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에 간 박종만. “으악!”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제 너 자신을 용서해 줘. 네 동생이 편하게 쉴 수 있게. _안녕, 쥐방울
영아는 언니 은서의 품을 떠날 줄 모른다.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영아는 언제나 은서와 함께 있다. 학교에서 외톨이인 은서에게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남자아이가 있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 그 남자아이가 은서 뒤에 숨은 영아를 보고는 손을 흔든다. “그 아래 누가 있나 보지? 안녕, 나는 은서 짝이야.”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나한테는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_연우가 연우에게
12월 21일, 연우의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멋진 파티나 대단한 선물이 아니라, 엄마 아빠랑 식탁에 둘러앉아 미역국을 먹으며 평화롭게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을 뿐이다. 수많은 생각을 떠안고 떠난 여행에서 버스는 눈길에 갇혀 버리고, 머리가 흰 까치에게 눈을 빼앗긴 연우 앞에 어떤 언니가 나타난다.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에 떠난 그 여행에서, 연우가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