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게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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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말고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 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까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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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이나 구두를 보면, 예전엔 한 남자를 위해 샀지만 이젠 단순히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내겐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저런 것들을 갖고 싶어할 까닭이 있을까? 온몸에 한기가 몰려와 숄을 둘러야 할 지경이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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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사적으로 그 사람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떠올려보았다. 그 사람의 푸른 눈, 이마 위에서 물결치던 그 사람의 머리카락, 어깨의 곡선이 자세히 생각났다. 그 사람의 치아와 입 안의 감촉이 느껴졌고, 허벅지의 모양이며 꺼끌꺼끌하던 살갗마저 만져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행위와 환각 사이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과 광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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