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고, 재미있고, 날카롭고, 묵직한 힘이 넘치는 그림책
“돼지왕”이라는 커다랗고 딱딱한 느낌의 제목 아래로 왕관을 쓴 돼지가 턱을 잔뜩 치켜들고 잘난 체하며 걷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돼지왕이 걷는 길은 양들이 무거운 판자를 등에 지고 줄지어 늘어서 만든 것입니다. 돼지왕은 눈을 감고 있어서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알지만 관심도 없고,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는 걸까요? 돼지왕이 양들을 ‘밟고’ 있는 이 책의 표지는, 그림 그대로 돼지왕이 양들을 짓밟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돼지왕]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돼지왕과 그 아래서 신음하는 힘없는 백성인 양들의 이야기입니다. 돼지와 양의 우화로 글은 아주 쉽고 간결하지요. 하지만 한심하고 못된 왕이 벌이는 갖가지 소동과 난리법석이 기발하고 과장된 그림 속에 촘촘히 담겨 있어 어린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우습고 재미난 이야기로 다가갈 것입니다. 양들이 돼지왕의 새 옷을 만드는 장면만 보아도 작가의 재치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있지요. 각 장면을 보고 또 볼수록 점점 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많이 찾아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 속에 담긴 주제의식은 결코 가벼이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돼지왕의 행태와 변화 과정에서는 지도자의 권력과 리더십, 지배와 피지배의 공존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고민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림책에서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묵직한 주제로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그림책입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왕의 모습
돼지왕은 말 그대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나, 밤낮없이 양들에게 시키지요. 그러니 양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결과겠지요. 하지만 돼지왕은 양들이 왜 불만투성이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양들이 자기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심지어 돼지왕은 양들이 자기를 좋아하기 바랍니다. 자기 때문에 양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양들을 향한 눈과 귀는 닫은 채, 모든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한테만 쏠려 있지요. 그러다 보니 더 근사해지면 양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왕의 근사한 새 옷을 밤새도록 만드는 건 온전히 양들의 몫입니다. 아무리 멋진 옷을 입어도 양들은 돼지왕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돼지왕을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양들은 그나마 자신들을 따뜻하게 지켜 주던 양털도 모두 빼앗겼거든요. 돼지왕은 양들의 털을 몽땅 벗겨 자기 옷을 만들고 그 앞에서 자기를 좀 봐 달라고 잘난 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이제 따뜻한 털도 없이 비 내리는 추운 들판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이런 돼지왕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왕의 모습입니다.
‘착해지려는 노력’이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나를 좋아해 줄 거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돼지왕에게 작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좀 착해지려고 노력이라도 하면 모를까.” 그러자 돼지왕은 투덜댑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충분히 착했다고!” 누가 들어도 어이없는 그 말은 돼지왕이 얼마나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부족한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날 밤,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털을 몽땅 빼앗긴 양들이 추운 들판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돼지왕은 전에는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던 감정을 경험합니다. 양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미안하다는 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며, 상대방이 어땠을지 그 입장이 되어볼 때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어쩌면 돼지왕은 ‘착하다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본 모양입니다.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는 일, 다른 이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려 애쓰는 일은, 굳이 돼지왕과 그의 지배를 받는 양들이라는 정치적 관계가 아니라도,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서로가 ‘착해지려는 노력’을 한다면 그런 마음을 주고 받으며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게 되겠지요.
백성들이 좋아하는 왕이 되는 길 ? 미안해 하는 마음, 공감과 배려의 힘
마침내 양들을 위해 뭔가 착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돼지왕은 밤새 양들이 자기에게 만들어 주었던 옷을 다시 뜯어 양들을 위한 옷을 만듭니다. 빼앗긴 양들의 털은 결국 양들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사실 완벽하진 않습니다. 이전에 양들을 감싸주었던 것처럼 온전한 형태도 아니고, 돼지왕이 준 옷은 왕에게나 어울리는 가운이지, 백성들에게는 그다지 실용적인 모양도 아닙니다. 하지만 양들은 모두 앞으로 조금은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꽤 좋은 시작인 셈이지요. 돼지왕이 양들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 양들에게 진심으로 공감하며 뭔가 착한 일을 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이 조금씩 더 자란다면 언젠가는 그 말에 귀 기울이고 싶고, 바라보고 싶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