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대의 석학,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문화의 기원은 과연 무엇인가
《문화의 기원》은 2004년 프랑스 DDB(Desclee de Brouwer) 출판사에서 나온 르네 지라르의 Les origines de la cultur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한국어판은 프랑스어 원본에 한 장(章)이 더 추가된 것이다. 한국어판 출간을 기해 좀더 완벽한 판본을 발간하자는 르네 지라르와 DDB 출판사의 제의에 따라 프랑스어 원본에는 없던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라는 내용을 7장으로 추가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온 《문화의 기원》 판본 중에서 가장 업데이트된 판본이 바로 이 한국어판라고 하겠다.
판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하자면, 이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은 부분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리우데자네이루와 밀라노에서 각각 포르투갈어판과 이탈리아어판으로 먼저 출간된 적이 있었다. 그뒤 드브레에 관한 글이 추가되어 2004년에 프랑스어판이, 그리고 이번에 한국어판이 나왔으니, 순서로는 네 번째인 셈이다.
* 이 책의 개요
이 책은 르네 지라르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피에르파올로 안토넬로, 리우데자네이루 대학의 비교문학 교수 주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샤와 나눈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두 교수와 르네 지라르 사이에 몇 개월이라는 시간을 두고 진행되어온 인터뷰를 모아놓은 결과물이다.
그 동안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등의 저서가 번역 소개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르네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개의 가설을 가지고 40년 전부터 인문학계를 전복시켜온 학자다. 르네 지라르와 두 명의 대담자가 지라르의 모방이론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책의 형식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을 연상케 한다. 심리학자인 우구를리앙과 기 르포르와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 자세히 설명하거나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에 대한 반박과 해명을 전개한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지라르는 자신에 대한 숱한 오해와 비판에 대해 정말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해명하고 있다.
동시에 지라르는 그 동안 독자들이 자신에게 품고 있던 온갖 의문들에 대해서까지 정말 속 시원히 털어놓고 있어, 가히 지적 자서전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지라르 자신의 지적 이정표도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어느 순간,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를 소상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면 주요 저서를 집필하던 배경과 당시 상황 등을 밝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때 연구 자체에만 몰두하여 정작 논문 발표에 소홀하다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연구업적 미비’라는 이유로 인디애나 대학에서 물러나게 된 일화까지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지라르가 자라난 배경을 시작으로 자신의 저서들을 집필한 과정과 관련된 전기적인 사실들을 거론한 다음, 이어서 모방 메커니즘, 지라르 작업의 기독교적인 성격(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과 함께, 인간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에서 오늘날과 같은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지라르의 생각에 기독교적인 관념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뒷부분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이 책에서는 어떤 점에서든 르네 지라르와 연결될 수 있을 여러 학자들의 이론과 저서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 모방이론의 개진
먼저 모방이론과 관련해 말하자면, 이 책에서도 르네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모방적 욕망만이 자유로우며 진정으로 인간적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욕망이 대상보다는 모델을 선택하기 때문에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방적 욕망을 통해 우리는 인습에 사로잡힌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인간으로 하여금 ‘적응’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욕망의 이러한 모방적 성격 때문이며, 따라서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한다는 것이다.
모방이론은 그 표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점에서 이 방면의 논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첫째는 인류 문화의 발생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발생법칙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농업의 발생이나 동물의 가축화 또는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선물과 같이 인류 문화와 기술의 전개에서 기이하게 보이는 여러 양상을 설명해내는 인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미셸 세르라는 학자가 르네 지라르를 ‘인문학의 다윈’으로 간주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 희생양 이론의 심화
르네 지라르는 문화의 기원이 희생양 메커니즘에 근거해 있으며, 인간사회의 초창기 제도들은 이 메커니즘에 대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되풀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이를테면 문화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지라르는 이 책에서 그 대답은 ‘제의를 통해서’라고 잘라 말한다.
그 과정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예기치 않았던 모방적 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화는 일정한 날을 정해 폭력을 행사하는데, 사전에 계획되고 통제되는 이 폭력은 말하자면 하나의 제의가 된 폭력이다. 애초의 희생양을 다른 것으로 바꾼 대체 희생양에게 한결같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되풀이함으로써 이 제의는 문화 전수의 한 형식이 된다. 이 제의는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똑같은 모방위기의 순간에는 언제나 이 제의가 개입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의는 모든 형태의 위기를 진정시키는 하나의 제도로 변함으로써 하나의 문화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라르는 그러한 예로 청년기의 위기를 성년의식으로 진정시키고, 죽음의 위기를 장례식이라는 의식으로 용해하고, 질병의 위기를 제의적인 치유로 잠잠하게 하는 것을 들고 있다.
자연선택설이 동물 종의 진화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면, 희생양 이론은 인류 문화의 발생과 진화의 기초가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물론 아직 가설 단계에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다른 공간에서 다른 방법과 다른 연구를 통한 논증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대담에서도 지라르는 자기 연구의 과학적인 귀결, 자연과 문화의 진화적인 연속성, 인간의 상징적 발전에서 희생양이 행하는 선택의 메커니즘 등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 오늘날의 모든 현상에 대한 분석
기독교를 인류학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 지라르의 이론은 문화와 사회적 현상을 그 기원에서부터 설명하려 하는 흔치 않은 이론이다. 지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을 이 책은 지금 이 시대에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해주는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 르네 지라르를 밝혀내는 각별한 빛을 제공해준다. 처음에는 문학 연구로 시작했지만, 인류학으로 나아가는 과정부터 처음 접하는 학문들을 혼자서 헤쳐나간 그의 작업은 거의 독학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라르가 걸어온 이 외로운 행로는 이런 계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늘날의 주류 학파와 유행 제도적인 관행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르네 지라르는 바로 이 때문에 자유라는 대단한 경지를 누릴 수 있었다는 데에서 우리는 양면성의 편재를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기원의 탐구라는 과거로의 여행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그 특유의 개념을 동원하여 오늘날의 여러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설명해내고 있다. 예를 들면 9?11사태의 원인을 종교와 문명권의 대립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과는 달리, 이들 문화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이로써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전망을 지라르에게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에 현대인의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는 이런 생각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시작된 모방이론에서 나온 결론일 것이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제공에서 지라르가 우리에게 빛을 던지는 영역은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등장한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분석은 우리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인류가 "모방 메커니즘이라는 악마 같은 세력이 고삐가 풀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가 낳고 있는 순응주의와 선악판단 불가지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방에 쉽게 휩쓸리게 하여 서구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무서운 대중주의를 낳는 등, 대중 차원의 모방적인 편중 현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순응주의나 불가지론이라는 차이의 소멸 현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 르네 지라르 여정의 총결산
지라르는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자신이 행하는 작업의 의미를 암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시적으로 밝혀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 지라르에게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스스로의 행로를 자신이 명기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인생 행로를 〈서문〉의 제목인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말로 요약하는 데서도 드러나듯, 지라르는 자신의 작업과 야망을 다윈과 비교하는 것을 즐겨 하고 있다. 지라르는 다윈과의 관련성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장이 다윈의 글로 시작되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지라르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동안 지라르가 ‘모방’을 어떤 부분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았는데 어떤 대목에서는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듯하여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온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이런 망설임들이 지라르의 총결산인 이 책을 통해 대부분 해소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