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가 없었다면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 마르틴 하이데거
“지금 그리스 철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수백 년 동안 우리의 발전을 억제해왔고, 이제는 참기 어려운 상태를 초래한 불행한 분열이 그리스 철학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그런데도 이 철학이 세운 지식과 사유의 건물이 그토록 잘 구성되고 잘 발달되어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일은 세계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했다.” ―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처음으로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를 탄생시킨 그들의 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정신의 혁명으로 부르는 그들의 업적에 가까이 접근해보고자 한다. 말레비치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비밀스럽고 경이로운 계시다. […] 어쩌면 우리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가 이런 교육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것이다.” ― 지은이
“칸트의 표현을 빌려 단순화하면, 자연과학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철학 없는 자연과학은 맹목적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 없는 철학은 지적 유희와 공염불로 전락하기 쉽고 철학 없는 자연과학은 과도한 일반화와 편협하고 섣부른 독단론으로 치닫기 쉽다. 어느 쪽이든 우리의 문화와 문명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그리고 이미 그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이러한 지적인 단절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호 학습과 대화가 절실하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매개로 그러한 접근과 대화의 요청에 부응하고 있다.” ― 옮긴이
1. 인간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대폭발
기원전의 한순간, 지구 곳곳에서 ‘나’ ‘존재’ ‘우주’를 화두 삼은 물음과 깨달음이 꽃을 피운다. ‘내가 사유해 자아를 탐구하고 진리를 찾겠다’는 인류의 지적 욕망이, 동시대에, 여러 문명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중국의 노자와 공자, 인도의 마하바라와 붓다(석가모니),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투라(조로아스터) 들의 생각과 말이 탄생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비슷한 시기 그리스 세계에서도 인류의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값진 사유와 비판과 논쟁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이 책은 서양 철학과 자연과학의 뿌리가 되는 기원전6~5세기 태동기 그리스 철학의 발생·발전·인물·쟁점·현대철학 및 현대과학과의 접점 들을 풀어내 정리한 것이다. 지은이는 먼저 그 발생 및 발전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직관과 합리적 사유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으며 전체를 이루었던 시대를 차분하게 돌아본다. 그리고 연대기에 따라 탈레스~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철학자 저마다의 사상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2.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이 시기 문헌을 집대성한 고문헌학자 헤르만 딜스는 본문의 주인공인 탈레스~데모크리토스 들을 포함해, 기원전 5세기~6세기에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리스 철학자들―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과 피타고라스학파,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 엠페도클레스와 원자론자 등등―을 통틀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라고 일컫는다.
‘이전’이란 생몰 연대를 기준으로 ‘소크라테스 이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처음으로 개척한 이들의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다. 예컨대 데모크리토스만 해도 소크라테스보다 늦게 태어났다. 또한 가치평가의 뜻도 없는데 ‘이전’이라고 해서 소크라테스에 도달하기 전의 낮은 단계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반대로 더 우수한 단계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된 것인 만큼, 이들 사상의 맥락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3. 현대철학 및 현대과학 상상력의 뿌리
이들의 사상이 담은 풍부한 상상력은 현대철학과 현대과학에도 끝없이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고대철학사 및 고대문헌학에 정통한 현역 화학박사인 지은이는 철학사의 한 장면을 복원·조감하는 것은 물론이고 태동기 상상력의 질박한 뚝심과 원시적 생명력이 슈뢰딩거, 비트겐슈타인, 아인슈타인, 보어, 포퍼 들의 사유와 상상력에는 어떻게 가 닿았는지를 함께 풀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탈레스의 질문과 양자역학 사이에 다리를 놓고, 데모크리토스의 무릎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찾아내기도 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과 생각에 인류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생명력이 어떻게 살아 숨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 불, 흙, 공기’ 같은 질박한 언어가 ‘양자, 주기율, 분자식’ 같은 언어와 자연스럽게 손잡고 있는 풍경은 이 책의 특징과 서술 방향을 잘 보여주는 표지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옛날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식의 환원주의가 얼마나 진부하고 무책임한지를 충분히 알고 있으며 어떤 문단에서도 이런 유의 설명은 철저하게 제어된다. 아래 예문처럼, 지은이는 고대와 현대의 접점 앞에 선 독자가 피상적인 호기심 만족을 넘어 적극적으로 비판의 맥락을 마련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관점과 현대 과학의 이론이 일치하는 경우에도―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이런 경우는 매우 많다―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해석 방식은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이 단순히 그리스 사상의 유산을 이어받아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러한 일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소질 외에도 그들을 올바른 과학적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선천적인 직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 특유의 “사고방식”이 그 이후 유럽 사상의 발전 과정 전체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 나머지, 지금까지도 유럽의 사고방식이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 질문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해답을 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일치를 너무 강조하다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고, 반대로 비슷함을 무시하여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오해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대답이 옳은가 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 따져보고 찾아보기 바란다.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개관’에서
3. 고금소통과 근원탐구의 한 예
오늘날 고금소통(古今疏通)과 근원탐구(根源探究)라는 화두는 한국 인문학 전체의 큰 과제다. 오늘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사유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그 사유와 비판의 심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어떤 분야에서든 ‘탄생’과 ‘기원’의 뿌리에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고금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반성은 이미 많은 연구자가 하고 있다. 시민사회 또한 그 성과에 목이 마르다. 하지만 성급하게 성과를 내려다 오늘을 망각한 채 고대로 퇴행해 안주하거나, 현대에 모든 것을 수렴하는 잘못도 더러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고문헌의 산더미 속에서 오늘로 나아가는 방향을 잡고, 현대라는 독특한 시대가 낳은 사유 방식과 학문 방법론 쪽에서 근원탐구의 통로를 열어두고 있다. 이 점에서 연구자와 시민을 포함한 독자에게 만만찮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어판을 펴내어 읽는 보람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중요 내용
1. 지은이가 설명하는 전지구적이며 동시적인 ‘철학의 탄생’
기원전6~5세기에 노자, 공자, 석가모니, 차라투스투라 들이 저마다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스 철학이 태동한 시기도 이 즈음이다. 칼 야스퍼스는 이 독특한 역사적 순간을 세계사의 “축의 시대”라고 부른다. 동시에 터져 나왔지만 문명권 저마다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사유의 방향은 조금씩 달랐다. 예컨대 거대한 중국 제국에서는 정의로운 정치 질서 안에서 인간 서로가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려는 실천적인 고민이 사유를 지배했다. 인도에서는 인생의 심오한 의미에 대한 최초의 질문을 제기하는 종교적 고민이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도, 권력을 지닌 종교도 없던 그리스에서는 “그때도 인간의 경이감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되었다.”
2. 다른 문명권과 구별되는 ‘그리스 철학’의 특징
그리스 철학의 고향은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이오니아 해변이다. 이 지역은 상업 활동과 전쟁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관념이 교차했기 때문에 전통의 권위가 강하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 밖―이집트와 수메르, 트라키아, 동방국가의 과학과 신화와 종교와 접할 기회도 많았다. 게다가 그리스에는 사제 집단도 성스러운 경전도 따로 없었다. 다양한 지역과 민족의 문화를 만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의 기적 앞에서 저마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것을 관찰과 탐구로 이어갔다. ‘서양 철학’은 여기서 탄생했다.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 겪는 일에 대해서도 경이감을 느끼고 이를 지성의 힘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들이 곧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우주의 속성과 구조뿐 아니라 우주 속 인간의 위상에 대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첫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런 질문은 앞으로 전개될 철학과 과학의 바탕이 되었다. 그들은 어떤 선입견도 없이, 어떤 권위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지성만으로 현상을 검토하는 모험을 처음 감행했던 것이다.
사물에 파고들어 아르카이archai, 즉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추상抽象’과 ‘체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사물을 몇 개 되지 않는 기본 원소로, 혹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구성요소로 환원하려 할 때 이 두 가지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도구다. 여기서 유래한 합리주의는 이후 서양사에 각인되었고 과학 발전도 이끌어냈다. 소박한 ‘첫 질문과 첫 깨달음’과 보다 복잡해지고 세련된 방법론 사이의 접점은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이 책의 지향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는 말 그대로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철학(형이상학, 윤리학, 심리학, 사회학)뿐만 아니라 과학(물리학, 화학, 우주론, 생물학)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고, 통일적인 전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기존 연구는 문헌학과 철학의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구식 인문학자들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서양 사상의 선구자들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학과 고문헌학을 동시에 익힌 지은이는 갈레레이 이래의 철학-과학의 성과까지 아울러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주장과 쟁점을 제시할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경이감, 갑자기 어둠을 뚫고 나타난 인간 이성에 대한 경탄이 이 책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분위기다. 물론 몇 가지 문화·사회 배경을 예로 든다고 해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출현이 충분히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료의 제약 속에서도 철학사 태동기의 윤곽을 포착해 초기 그리스 철학 사상을 대중에게 보다 널리 소개하고, 세계와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념과 사유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자 하는 욕망도 그들의 사상을 공부해야 하는 까닭이 될 수 있다.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인 원전에서 하나의 전체적인 상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이 책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