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고 정치한 기획과 시선으로 김훈 소설의 전모를 읽어내다
중등 교육과정 교과서에도 등장해 누구나 아는 김훈, 그러나 정작 김훈의 작품을 읽어도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김훈 문학의 진면목.
여기 김훈 문학의 비경과 김훈 문학 해석의 진경이 만나 우리 시대 또 하나의 인문학 고원으로 탄생했으니, 이름하여 가히 ‘김훈학金薰學’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눈 밝은 독자들에게 그 가능성 여부를 묻는 책이다. 김훈 문학에 대한 이해와 탐구는 앞으로 이 책 이전과 이후가 있을 것이다. 사랑의 불가능성, 자연주의, 시간, 묘사, 음식 등등의 열쇳말을 지렛대 삼아 김훈 문학의 비밀을 열어젖히는, 논문과 평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탐색의 글쓰기.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서부터 최신작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 이르기까지 김훈 문학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사랑의 불가능성이라는 테마에서 시작한 이 책은 코로나 시대에 읽는 생명 다양성 주체에 대한 해석으로 마무리된다.
김훈은 누가 뭐라고 해도 21세기 한국소설문학을 대표하는 뜨거운 상징이다. 작품성과 대중성 양 측면에서 김훈처럼 일정한 기대지평을 충족시키는 소설가는 많지 않다. 물리적으로는 이미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그는 특유의 작가적 기상으로 여전히 몽당연필로 원고지를 꾹꾹 눌러가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갱신, 확장시키고 있다.
자기만의 문체와 미학적 직관을 가진 영민한 기자로 먼저 알려진 김훈이 소설가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평판작 『칼의 노래』(2001년)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작품은 그에게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내려진 축복”이라는 찬사와 함께 동인문학상을 안긴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53세. 그리고 근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왕성한 필력으로 한국문학을 선두에서 끌어가고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김훈에 대한 문학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미진해서 결코 문학 독자의 니즈를 충족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화제작에 대해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평문이 발표되었을 뿐, 총체적인 시각에서 김훈 문학의 전모를 조감하려는 노력은 시도되지 않았다. 이는 분석의 대상이 된 자리에서 노련하게 미끄러지는, 김훈 소설이 갖는 자기소외적 경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텍스트의 난망함과 불편에 맞서려는 문학연구자들의 패기와 섬세한 기획의 부재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삼인에서 펴내는 신간 『김훈을 읽는다』는 이 같은 한국문학 평단의 전제적 조건에 의미 있는 균열을 내는 인상적인 증물로서 독자들 앞자리에 놓일 책이다. 1995년부터 평론활동을 시작한 저자 김주언은 같은 해에 출간된 김훈의 처녀작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부터 최근작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꾸준히 치열하게 따라 읽으면서 연쇄적으로 인상적인 논문과 평문을 발표해왔다. 그렇게 쌓인 열한 편의 논문 및 평론, 그리고 한 편의 내실 있는 대담을 함께 묶은 평론집이 바로 『김훈을 읽는다』이다. 물경 문학연구자의 자존심을 건 20년이 넘는 기획 연구의 극적인 산물인 셈이다.
김훈 소설을 이해하는 유효하고 적실한 키워드들, 서로 스미고 짜이다.
이 평론집이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매력은, 김훈이라는 한 작가의 작품들을 해제하고 분석하는 데 동원한 작가의 섬세한 기획력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식의 나무랄 데 없는 유연함과 적실함에 있다. 그는 김훈의 소설들을 상세히 톺아보기 위해 몇 가지 유효한 키워드들을 가져오는데, 그것들은 비평의 지향과 테마의 유사성, 친족성, 상호텍스트성에 따라 전체 4부로 나뉘어 운위된 후 배치된다.
1부 소개
1부, 「관념에서 의미로」에서는 사랑의 불가능성, 자연주의, 시간, 호모 비아토르 등 형이상학적 키워드로 김훈 소설이 드러낸 깊은 관념성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의미 있는 의미로 기화하는지를 소구한다. 특히 ‘사랑의 불가능성’을 다룬 글에서는 사랑의 존재론적 위상과 연민이라는 자재연원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응전 및 투쟁 방식을 치열하게 파고든다. 저자는 김훈의 소설에 나타난 사랑관을 섬세하게 헤아리고 전제로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김훈에게 ‘사랑’이 말해지는 바탕은 결국 ‘무’의 지평이다. 생명의 가능성,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가능성은 바로 사랑의 가능성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를 대신해 생명의 자리에 놓인 그 사랑에 눈물겨워하는 태도가 바로 소설인 셈이다. 이것이 김훈 소설에서 사랑이 갖는 존재론적 위상이다.” 이 전제는 이어서 인상적인 가설로 이어진다.
“김훈의 소설 텍스트에서 발견하기조차 힘든 ‘사랑’이라는 기표는 이처럼 빈곤한 양상으로 겨우 존재한다. 이 텍스트들에서 ‘사랑’은 단지 절제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을 ‘사랑’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내적 욕구를 밀고 나오는 언어가 아니다. 또,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의 무의식과 욕망을 불충분하게 실현시키며 사랑을 비켜가는 경우도 아니다. 일단 김훈의 텍스트에 이처럼 등장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의 의미로 사랑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스테레오 타입으로 협애화된 사랑의 의미에 간단히 동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언어적 실천 행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랑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이미 불가능해진 사랑에 저항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저자의 직관적 해석은 꽤 놀랍다.
한편 김훈의 소설을 ‘호모 비아토르’라는 개념으로 읽어내면서 호모 파베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그것으로부터 진화한 내력을 포착하는 대목은 평론가로서 김주언이 얼마나 뛰어난 감식안과 인식의 유연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류는 호모 비아토르의 운명을 바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통해 실현하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훈의 역사소설에서는 말이나 배와 함께 등장하는 마노리나 문풍세 같은 호모 비아토르도 있지만, 또 『남한산성』에서처럼 말에서도 내려서 오직 땅에 난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호모 비아토르도 있지만, 당대 현실을 소설의 시점으로 택한 작품들에서는 현대 문명의 바퀴와 함께 호모 비아토르가 등장한다. 오토바이가 등장하는 『공터에서』, 택시가 등장하는 「배웅」과 「고향의 그림자」, 불도저가 등장하는 「항로표지」, 열차가 등장하는 「언니의 폐경」, 비행기가 등장하는 「강산무진」, 이 일련의 작품들에서 호모 비아토르들은 어김없이 바퀴와 함께 길위에 있다”
2부 소개
2부, 「감각을 넘어 지각으로」라는 제목 하에서는 묘사, 음식, 바다 등 감각적인 상호 감응을 하는 키워드를 통해 김훈 소설이 추구하는 미학의 본질적 가능성, 다시 말해 세계를 자연사적으로 지각하고자 하는 김훈 소설의 특성을 촉지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분석한다. 감각을 뛰어넘은 지각들은 1부에서 조망된 ‘관념’을 초극한 ‘의미’와 겹치면서 김훈 소설의 특징으로 알려진 무의미성과 허무성을 회의하는데, 「묘사의 문제」와 「음식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1부에 수록된 「자연주의의 문제」에서 드러난 김훈 소설의 자연주의적 기술 태도에 시나브로 유동되는 서술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연주의의 문제」의 다음과 같은 기술 “인간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파악하려고 하는 자연주의 소설의 유별난 특징은 인간의 신체 기능을 다루는 데에 세심하게 공력을 들이고 솔직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문학적 자연주의든, 철학적 자연주의든 자연주의 인간학의 요체는 간단히 말해 인간을 자연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를 「음식의 문제」의 다음과 같은 진술 “모든 질서는 본질적으로 위계적 질서일 수밖에 없다. 김훈의 역사소설에서 음식이 놓여 있는 낮은 유물론의 세계는 균질적인 허무의 공간이 아니라 이 위계적 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음식은 작가에게 그 자체로 독립적인 위상을 가지고 집요하게 초점화되고 있는 세계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낮은 물질로서의 음식은 인간을 자연화하는 환멸의 먹이이거나, 높은 것에 대한 전복의 기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때로 부정할 수 없는 주이상스의 대상이기도 하다. 주이상스로서의 음식은 무력하나마 세계 내용을 다름 아닌 먹거리의 내용으로 긍정하며, 그 내용의 감동으로 세계를 긍정하는 힘이기도 하다.”가 일종의 유기적인 주석의 역할을 하면서 부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묘사의 문제」에서 묘사 대상을 완벽히 지배하고 전지적 신과 같은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작가의 욕망을 스스로 파기하고, 미지의 ‘대타자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소여되는 김훈 소설에서의 묘사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영민하게 포착한다.
김훈의 묘사 세계가 도전하는 것은 언어 표상으로 대상을 충분히 정의하고 장악할 수 있는 소타자의 세계를 넘어서 끊임없이 묘사 불가능성의 곤경을 동반하는 대타자의 세계이다. 그것이 작은 꽃 하나라 할지라도 근본적 타자성이 드러나면 묘사 불가능한 대상이 되고 만다. 꽃뿐만이 아니라 나무도 그렇다. “내가 제 눈에 비친 대로 나무를 겨우 그릴 수는 있지만 나무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나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까닭은 내가 나무를 닮거나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절대적 타자성은 어찌할 수 없게 도저한 것이다.
3부, 4부 소개
3부 「해부의 비평」에서는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다룬 김훈 소설 『흑산』과 한승원의 소설 『흑산도 하늘길』을 함께 논의의 대상으로 두고 비교·분석하는 평문과 함께 1990년대 인상적인 작품을 남긴 작가 성석제, 이순원, 이균영의 소설을 시간의 지평이라는 주제로 김훈이 소설과 함께 분석한 평문, 그리고 ‘비극소설’이라는 키워드로 김훈 소설이 겨냥한 세계관을 묻는 글 「비극소설의 문제」가 묶여 있다. 특히 「비극소설의 문제」에서는 김훈 소설의 돌올한 비극성의 근원을 섬세하게 탐문하는 게 인상적이다. 저자는 비극소설의 보편적 특질을 “비극소설에서는 사회·역사적 원인에서 비롯되는 갈등이라고 할지라도 해결 불가능한 불화의 근원적 비극성에 주목하기 때문에 그 갈등이 지양될 수 있는 변증법적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
문제는 상대적인 조정으로 진정되지 않는 또 다른 절대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라고 전제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는데, 김훈 소설의 비극정신이 가지고 있는 변별점은 “비극의 기초로서의 허무주의는 까닭 없는 부정이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사랑의 과잉에서 연유하는 절망이다. 허무주의를 넘어서 김훈의 비극정신은, 그러나 이 절망의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예각성에 있다. 초로의 나이에도 이 절망의 예각성을 견지한다는 것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지만 희귀한 자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절망의 예각성은 절망도 희망도 아닌 삶을 일상의 이름으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한 만큼 그 삶을 모욕하는 대상을 적대한다. 그것은 베일 정도로 날카롭기 때문에 얼버무림이나 타협이 없는 불화의 정신에 가깝다.”는 말로 예리하게 촉지해낸다.
4부에서는 물경 5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저자가 김훈과 가진 대담이 실려 있다. 이 대담은 인터뷰어를 맡은 저자가 일종의 담지자로서 김훈 소설세계에 다양하고 유효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당히 내실 있는 작가의 진술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는데, 근년 들어 김훈이 본인의 입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발언한 것 중 가장 구체적이면서 유의미한 내용이 담겨 있는 대담이라 할 만하다. 4부를 구성하는 다른 한 편의 글은 2020년 여름에 출간된 김훈의 최신작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의 해설로 쓰여진 텍스트로 김훈 소설의 살아 있는 현재와 도래할 미래를 들여다보고 있는 평문이다.
1부에서 4부까지 구성되어 있는 12편의 원고에는 공히 저자의 돌올한 비평적 감수성과 분석 텍스트의 구두점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염결한 태도가 여일하게 확인되는데, 그것은 온전히 김훈 소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나 미로에 갇힌 채 헤매었을 독자들에겐 축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김훈을 읽는다』는 김훈 소설이 문학 텍스트의 자의식을 갖고 인간 보편의 공시적 조건으로서의 당대와 관계 맺거나 맺어온 간단치 않은 의미를 문학적 문맥으로 정위시키는 시금석으로서 작지 않은 의의를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