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1주기(2010. 6. 25)를 추모하며…”
이제 나는 그를 자유롭게 숭배할 것이다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열여섯 살 소녀 주디 갈랜드가 〈오버 더 레인보우〉를 불러서 수많은 사람에게 판타지를 안겨 주고 시대를 사로잡은 것처럼, 이미 열세 살에 〈갓 투 비 데어〉와 〈벤〉을 부르던 꼬마 마이클 잭슨은 스물네 살이던 1982년 《스릴러》앨범을 발표한다. 그리고 단 4분의 공연으로 전 세계를 판타지로 물들이고 수백만 명의 열성팬을 만들어 팝 음악계의 거물이 된다.
〈빌리진〉 공연무대에서 그가 미끄러지듯 걷는 ‘문워크’를 선보이자 관객은 무아지경과 황홀경에 빠졌다. 문워크를 비롯한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당시 모든 젊은이를 사로잡았으며 누구나 한 번쯤 따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검은색 반짝이 재킷을 입고 검은 가죽구두에 하얀 양말, 몸에 딱 붙는 검은 바지를 입은 마이클은 그야말로 신비에 가까웠으며 마침맞게 왼손에만 낀 하얀 장갑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가수가 아니라 마치 마법사 같았다. 그의 마법으로 음악은 사업의 영역에서 단숨에 산업 영역으로 발돋움했으며 자신은 일거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잇는 “팝의 제왕” “팝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가 남긴 기록은 간단히 살펴봐도 총 7억 5천 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 기록, 한 앨범 9곡의 싱글 중 무려 7곡을 빌보드 TOP 10에 올린 《스릴러》, 1995년 발표한 〈유 아 낫 얼론〉은 팝 역사상 최초 빌보드 1위 데뷔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 영광과 함께 마이클 잭슨은 엄청난 부를 얻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철저하게 그 명성에 무너지고 희생당한다. 와코재코(괴짜 잭슨)라고 불리며 온갖 구설에 시달리던 그는 아동 추행으로 법정 소송에 휘말려 급기야 신체 수색이라는 처참한 일까지 당한다. 그리고 믿었던 주위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기 시작한다. 하물며 돈에 눈먼 가족에게까지…
피터팬 마이클 잭슨, 그만의 달을 향해 떠나다
여러 구설과 소송에 휩싸이긴 했지만 그는 틀림없이 아이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이 때부터 이미 슈퍼스타였지만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마이클은 보상심리에서인지 성인이 되고서 자신이 사는 공간을 네버랜드라 이름 붙이고 스스로 피터팬이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주려고 괴짜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자신이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리고 만다. 그리고 언젠가 예언했던 것처럼 자신의 장례식을 지상 최대의 쇼로 만든다. 그렇게 마술 같은 인생을 살다 간 마이클 잭슨은 달의 분화구에 자신의 이름을 홀연히 남긴 체 쓸쓸한 문워크로 그만의 독특한 판타지를 남기고 신화가 되었다.
한 매체(GLM)의 조사를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21세기에 인터넷에서 두 번째로 많이 다루어진 기사라고 한다. 1위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고 마이클의 죽음은 9ㆍ11테러, 글로벌 금융위기, 베이징 올림픽, 허리케인 카트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2004년 쓰나미 기사보다 인터넷에서 더 많이 다루어졌다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현란한 다리 흔들기와 엉덩이 돌리기로 ‘영상 박제’ 되었다면, 마이클 잭슨은 좀더 격렬한 몸동작과 현란한 문워크 그리고 사타구니를 휘감고 내지르는 짧은 탄성으로 30여 년이 다 된 지금까지 강렬하게 ‘영상 박제’ 되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지금까지도 백반증과 성형부작용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최근 모습보다도 더욱 또렷하게 대중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렇게 강력하게 대중문화의 전령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비록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 불행조차도 강력한 전설 일부로 남겨 놓았다. 사람에 따라 그가 진정한 ‘팝의 황제’인지 논란을 벌일 수도 있겠고, 온갖 추문 때문에 그를 대놓고 흠모하기 어려웠다면 이제 모든 생의 영광을 뒤로하고 쓸쓸히 사라진 인간 마이클 잭슨을 만나 보아야 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채찍과 벨트로 두들겨 맞기도 하고, ‘잭슨 파이브’로 성공한 꼬마 스타는 친구조차 만나거나 사귈 수 없었던 외로움에 사무쳤다. 그리고 이십 대 초반에 이미 더는 넘을 수 없는 슈퍼스타가 된 그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크게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항상 잊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방어하거나 돌보는 것도 잊은 채 대중에게 판타지를 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제 우리는 너무 많이 가져서 오히려 세상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그를 만나 보아야 한다. 그리고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던 그를 세상의 편견을 비켜 존중해야 한다.
마이클 잭슨은 아름다운 흑인 소년에서 괴상한 외모의 창백하고 중성적인 성인으로 변모해 온갖 불쾌한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언제든 전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쇼맨”이었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예언했듯이 자신의 장례식을 “지상 최고의 쇼”로 만들었다. 2009년 7월 7일 LA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진행된 장례식에는 180만 대 1의 경쟁률로 8천 5백 명에게 1인 2매씩만 입장권이 배부되어 1만 7천 명의 관객이 함께 했고 입장권을 얻지 못한 팬들 중 백만 명 가량은 그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2009년 6월 25일 세상을 뜬 마이클 잭슨에게 죽음은 그의 특별한 삶에 대한 비극적인 종말이었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짙은 어둠의 미로에 갇혀 지내던 슈퍼스타의 뜻하지 않은 피날레이기도 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은 모순으로 뒤범벅 된 사내였다. 수백만의 팬을 몰고 다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팝 스타였던 그는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놀라운 노래 실력을 지닌 신동은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시절에 집착했고, 그런 성향은 그를 위험한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다. 인종편견의 장벽마저 부수어 버린 귀여운 얼굴의 흑인 꼬마는 서서히 피부색이 변하고 성형수술로 얼굴마저 바뀌면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갔다.
이토록 놀랍고 수수께끼 같은 사람의 생애를 어디서부터 살펴보아야 할까? 이 매력적인 평전은 ‘팝의 제왕’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여주려고 수많은 오해와 소문부터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마이클 잭슨의 삶에서 논란을 일으킨 측면도 과감하게 들추었고 동시에 전 세계 수많은 팬에게 크나큰 기쁨을 준 음악 천재에 대해 존경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