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글은 어떻게 세계로 뻗어 나아갔는가?
1992년, 사범대 졸업 직후 27세의 나이로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미지의 땅’으로 떠났던
해외 자원 1세대 한국어 교사의 30년 인물 기록집
1992년 3월, 전남대 사범대 졸업 직후 은사의 권유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던 한 인물의 30년 기록을 통해 ‘한글 세계화’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직조한 책이다.
당시 27세였던 청년은 이제 57세의 중년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구촌 변방의 언어였던 한국어는 세계 중심의 언어로 바짝 다가서며 ‘꿈(Korean dream)의 언어’로 확장됐다. 그가 떠났던 길을 따라 KOICA 교사들이 미지의 땅으로 파견됐고, 30년 동안 그가 가르친 8,000명가량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 교사가 되어 ‘한글 세계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허선행’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한-우즈벡 수교 30년 발전사, 현지 한인사회 형성사 등을 밀도 있게 다루면서 중앙아시아 한류 열풍과 현지 청년들의 한국어 학습 열기 등도 자세히 담아냄으로써 ‘제2의 허선행’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는 책이다.
한글아리랑 4중주
책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월곡 고려인문화관 결’에서 열리고 있는 ‘광주한글학교 개교 30주년 기획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행사는 1991년 광주·전남 지역 인사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옛 소련 지역에 한글학교 6곳을 만들었던 기록전이다.
세월이 갈수록 모국어를 잃어가고 있는 현지 고려인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복원시켜 주기 위해 설립된 이 한글학교들은 그러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며 1998년 이전에 모두 문을 닫았다. 그중 한 곳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 특별전의 의미를 빛나게 했다. 바로 그곳이 이번 책의 주인공인 허선행이 운영하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1 세종학당’이다.
이렇듯 ‘모국어 공동체의 확장’과 ‘한글 세계화’에는 먼저 민간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전남대 사범대 졸업반이던 청년 허선행은 옛 소련 지역으로 들어가서 한국어 보급을 위해 헌신할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교사 발령 직전, ‘가지 않은 길’을 택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다. 급여 한 푼 없고, 생활비 보조는 물론 현지로 가는 항공권조차 자신이 부담해야 했던 험난한 길이었다.
사실 그가 여기까지 오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랐다.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거쳐 결단에 이르기까지, 또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설득하고 신변 정리를 하기까지, 그리고 자식 고집을 어떻게 꺾으랴,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가 자신의 몫으로 물려준 재 너머 한 뼘 밭을 팔아 여비와 일 년치 생활비를 마련해 주신 어머님에 대한 감사와 불효자가 된 아픔에 이르기까지……. 다난했던 지난 몇 개월의 과정을 몇 마디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75p
책은 국내 지식인들의 이 같은 기금 마련과 열혈 청년들의 자원 봉사로 시작된 ‘한글의 세계화’ 과정을 다루면서, 현지 한인사회 및 고려인 사회의 역할과 대사관을 중심으로 펼친 정부의 역할, 그리고 대우자동차 등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의 역할이 모국어 공동체의 확장은 물론 ‘한글 한류’를 빚어내는데 있어 매우 중요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를 ‘한글 아리랑 4중주’라고 표현했다.
한국어능력시험 첫 대상국,
훈민정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네스코 회의 개최지, 우즈베키스탄
1997년 한국어능력시험(TOPIK)이 처음 실시됐다. 또 같은 해에는 훈민정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글 세계화’와 관련 기념비적인 이 두 가지 역사적인 사안과 우즈베키스탄은 모두 깊은 관계가 있다. 첫 한국어능력시험 해외 대상국은 일본과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4곳뿐이었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한 유네스코 회의가 열렸던 곳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였다.
책은 허선행이 우즈베키스탄 체류 5년 만에 현지에서 직접 접한 이 두 사안의 감동을 깊이 조명하며, 이 시기와 맞물려 대우자동차가 진출하고(1996), 아시아나항공 직항편이 개설되고(1997), 삼성 가전공장이 본격 가동되는(1998) 과정 속에서 고려인들의 모국어 복원 차원을 넘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현지 청년들에게도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게 되는 여정을 심도 있게 풀어간다.
또 주인공 허선행이 심각한 생활고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속에서도 ‘번역 일’과 ‘교민신문 편집국장’, ‘대학 출강’, ‘현지 기업체 한국어 연수’ 등 1인 5역의 역할을 통해 어떻게든 한글학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정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아리랑요양원의 기초를 세운 이헌태 초대원장은 그가 세상과 조금만 타협했어도 편하게 살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으로 시집오는 여성들이 많았을 때라고 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그들 중 상당수가 세종학당을 찾을 때였다. 그러니 결혼정보회사를 차렸어도 큰돈을 벌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일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고 했다. 또 유학생을 유치하려는 한국 대학들의 유혹도 많았을 텐데 그런 것 역시 단칼에 거부한 일화를 여럿 알고 있다고 했다.…… 305p
CIS 지역 첫 러시아어 판 한국어 교재 개발자로 발탁
허선행은 2006년 장원창 타슈켄트 교육원 부원장, 남 빅토르 국립니자미사범대 교수 등과 함께 교육부로부터 CIS 지역에서 사용할 첫 러시아어 판 한국어 교재 개발자로 발탁됐다. 책은 교재를 개발하는 과정과 교재에 대한 CIS 지역 한국어 교사들의 호평, 그리고 초급에서 시작해 중급과 고급 교재까지 개발해 나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사료적인 가치까지 지닌다.
또 허선행이 현지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 사업의 진행 과정과 남북 관계의 긴장 국면 속에서 멈춰 있는 안타까움을 담아내고 있는가 하면,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북한식당 사장과의 우정 및 탈북자 사업가와의 깊은 인연 등을 소개하며 통일에 대한 열망과 모국어 공동체의 완전한 복원을 꿈꾸는 허선행의 간절한 소망을 묘사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문화원이 개설돼 있지 않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그의 한글학교가 한류 1번지로 기능하며 활동하는 ‘한복체험 및 떡국체험’(1월 설날), ‘한국문화 축제’(6월), 세종학당재단이 후원하는 ‘세종문화아카데미’(7월), 추석 민속축제(9월), 중앙아시아 성균한글백일장 등의 한국어백일장(10월), ‘세종학당 한마음 체육대회’(10월), ‘김치축제’(11월), ‘세종문화의 밤’(12월) 행사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호 기록 유난히 많은 인물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수훈도
허선행에게는 ‘1호’라는 별칭이 많이 붙는다. 먼저 1992년 우즈베키스탄과의 수교(1월 29일) 이후 첫 입국한(3월 8일) 현지 교민 1호다. 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떠난 제1호 해외 자원봉사 한국어 교사이자 우즈베키스탄 한인회가 수여하는 제1회 ‘자랑스러운 한국교민상’ 수상자다.
이밖에도 제1회 ‘세계한인의 날’을 맞아 한글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는 영예를 누렸는가 하면, 대한민국 교육부가 위촉한 러시아어판 첫 한국어 교재 개발자로 발탁된 1호 기록도 갖고 있다.
이번 책을 쓴 조철현 작가는 허선행(許先行)의 외길 30년을 ‘선행(先行)의 선행(善行)’이라고 표현했다. 그 선행(先行)의 결과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외교부가 주관한 전 세계 3,500개 한글학교 평가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해 ‘제1회 세계한인의 날’을 맞아 국민포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한글발전 유공자’(2013)로 대통령 표창을 받는 등 두 차례의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고, 2021년도에는 ‘평화 번영의 한반도 기반 조성’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시작한 허선행의 ‘외길’은 실로 외롭고도 험난했다. 하지만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즈베키스탄의 한인사회가 그를 돕기 시작했고, 전라남도 지방의회 및 경기도 등의 지방자치단체들과 여러 NGO들이 그의 선행(善行)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전남 보성군청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타슈켄트 한글학교 사랑회’(회장 허호행)와 장학재단 ‘고려인의 꿈’(이사장 한영수), 퇴직 교사들과 현직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한글사랑샘’(회장 고선옥) 같은 단체들은 지속적으로 그의 한글학교를 지원하고 있어 책을 통해 이 같은 따뜻한 기록들을 보는 감동 또한 크다.
책은 또 그에 대한 제자들의 존경심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한국기업에 취직한 뒤 첫 월급을 탔다고 찾아오는 제자들이며, 매년 스승의 날이면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수많은 제자들이며, 한국으로 유학 와서 ‘스승에 대한 기사’를 꼬박꼬박 찾아 보내주는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그가 배출한 8,000명의 제자들은 모두가 30년 외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있어 ‘피로회복제’이고 ‘비타민’이고, ‘활력 영양제’들이다.
제자들과 함께했던 그의 30년 세월 속엔 기쁜 일도 많았다. 몇 년 전에는 한국으로 가던 비행기에서 제자를 만났다. 스튜어디스로 취직한 제자였다. 마침 아내와 함께 가던 길이었다. 비행 내내 제자로부터 특별 서비스가 이어졌다. 평생 고생만 시켰던 아내에게 체면이 서는 것 같아 고마웠다.…… 422p
5월 14일과 15일 광주와 서울에서 출판기념회
5월 17일엔 중앙대 대학원 특강도
이번 책의 출판을 기념하며 그동안 그의 한글학교를 후원했던 단체들이 그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5월 14일엔 이번 책의 첫 머리를 장식한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귀향 인사를 겸한 출판기념회를 열고, 15일 세종대왕 탄신일 겸 스승의 날을 맞아서는 한국에 나와 있는 그의 제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북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리고 5월 17일엔 방현석 중대 문창과 교수의 초청으로 중앙대 대학원 수업 시간을 통해 ‘우리 한글은 세계로 어떻게 걸어 나아갔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허선행의 한글아리랑》의 책 표지 글씨는 캘리그래피 1세대인 이상현이 재능기부로 썼다. 영화 ‘타짜’와 드라마 ‘해를 품은 달’, 구글의 ‘한글로고’ 등을 쓴 국내 최고 수준의 손글씨 작가 이상현은 ‘한글에 표정을 입히고, 감성이란 옷을 입히는 작가’라는 말로 자신의 캘리 23년을 소개했다.
허선행 역시 ‘한글에 희망을 입히고, 가능성이란 날개옷을 입히는 교사’라고 자신의 역할론을 정리한다. 둘의 만남이 잘 어우러져 빚어낸 ‘책의 표지’ 글씨가 ‘우리 한글의 세계화’를 제대로 상징했다는 평가라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이번 책을 펴낸 도서출판 라운더바우트는 이번 책의 판매 수익금 10%를 타슈켄트1 세종학당의 발전기금으로 기부한다. 특히 출판사 측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수교 30주년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정주 85주년을 맞아 이번 책을 출판한 기념으로 판매 수익금과 별개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을 약속해 《허선행의 한글아리랑》에 대한 출간 의의를 더욱 뜻깊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