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여, 역사청문회로 나오소서!
역사청문회? 낯선 용어다. 청문회하면 집권자에게서 솔솔 풍기는 악취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랬다. 물론 ‘고종황제 역사청문회’가 고종황제를 앉혀놓고 그의 비리를 캐내 진실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시도는 아니다.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진 황제, 사라진 제국의 모습을 복구하고 그것을 새롭고, 다양한 시각에서 재평가하기 위해서 기획한 것이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한국 근대의 형성 과정과 일제 시기의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 청문회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민감하고도 중요하다. 실제로 대한제국을 봉건적 구체제로 파악한 일부 논객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망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일제 식민 시대는 우리에게 근대화를 선물해준 시기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제 식민 시대가 새롭게 평가된다면 일본의 과거사 처리 문제, 국내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친일파 발언, 그리고 정부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대하는 시각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청문회는 사회, 정치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평가 문제는 단지 과거의 일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작업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태진 교수,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역사청문회의 장으로 불러낸 사람은 그동안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제시해온 서울대 이태진 교수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고종황제는 영?정조의 민국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이자 자력으로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인물이다. 아울러 대한제국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도 자주 독립을 지키고자 했고, 근대 경제성장의 징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저평가해온 경제사학자는 이 교수의 주장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이라고 반격했다. 전남대 김재호 교수였다. 두 사람의 논쟁은 <교수신문>사의 지면을 통해 학계에 소개되었다. 이후 이 논쟁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근 6개월에 걸쳐 논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두 교수 외에도 9인이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이 책은 <교수신문>에서 진행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둘러싼 논쟁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으로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내용을 가다듬었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성격을 둘러싼 이번 논쟁은 얼핏 역사학자와 경제사학자들 간의 논쟁, 즉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립을 또다시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이번 논쟁은 이러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분법적 시각을 지양하고 고종시대를 총체적인 시각에서 규명했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이는 논쟁에 참여한 학자들이 내재적 발전론의 민족주의적 경향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의 통계 의존적 연구 방식이 시대의 본질을 통찰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미흡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데 기인한다.
우리의 ‘근대 찾기’에 몰두하는 대신 고종황제의 개인 자질 문제, 즉 왕정 극복 의식이 있었냐는 점, 근대화 정책을 수행할 의지가 확고했느냐는 점, 매관매직 등 부정을 일삼았는지 여부 등에 집중함으로써 고종황제의 역할을 적극 부각한 점은 이번 논쟁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 고종황제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용익, 이채연 등 황실 세력의 역할과 성격 문제를 짚어봄으로써 근대화 주체 세력을 전반적으로 평가해보는 시도도 꾀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실체를 밝혀보는 논의도 오고갔다. 그중 가장 중요한 쟁점은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의 성격 규정 문제였다. 특히 헌법 조항을 대일본제국헌법과 비교 논의함으로써 근대 헌법의 충족 요건을 조목조목 따져본 것은 주목할 만하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관련 정책에 대해서는 논쟁자들 간에 큰 시각 차이를 보였다. 광무개혁의 성과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논쟁거리였기에 논외로 치더라도 백동화 발행, 대한천일은행 설립 등 금융 분야의 정책과 광무양전, 수륜원에서 실시한 제언정비 사업 등 농업 분야의 정책을 비롯해 도시.운송.광산 등 모든 정책의 성과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일제는 우리에게 근대화를 선물했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다보니 그 시기를 전후해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도 다양했다. 갑오개혁과 갑신정변, 독립협회 활동이 특히 그러했다. 가장 민감했고 많은 설전이 오고간 사안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였다.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김재호 교수는 식민지 시기가 봉건적 구체제를 극복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식민지 시기에 들어서야 한국의 근대 경제성장이 비로소 시작된다고 강조하고 이 시기를 민족적, 감정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한제국이 내재적 발전 상태였고, 자발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고 보는 이태진 교수는 그것이 일본의 침략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여전히 침략과 수탈의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근대 경제성장 역시 일제 시기 이전에 존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사 일제 시기에 경제 지표 상으로 경제 발전 현상이 목격된다고 해도 그 이면에 있는 폭력과 억압, 수탈 체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지지하거나 반대하거나 혹은 넘어서거나
이태진, 김재호 교수 외에 이 논쟁에 뛰어든 9인의 필자는 각자의 연구 분야 시각에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문제를 다루었다. 역사 이론가인 김기봉 교수는 대한제국 시기를 절대주의시대라고 규정하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 시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왕현종, 주진오, 서영희 교수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을 지지, 보충하거나, 그 주장에서 드러난 한계를 지적해주었다. 강상규 박사는 고종황제의 탁월한 통치 철학과 외교 감각을 증명하려 했으며, 반대로 이영훈 교수는 고종이 성리학에 충실한 도덕군주라는 점을 지적하고 각종 경제 지표를 통해 이태진 교수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병천 교수는 일본에서 이번 논쟁과 유사한 논쟁적 흐름이 있었음을 소개하고 그 흐름과 비교하면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조언했다. 이헌창 교수는 논쟁의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중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핵심 논쟁이다!
_고종은 개명군주인가 부패하고 무능한 군주인가?
이태진 교수는 고종황제가 영정조의 민국이념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 서구 기계문명을 적극 수용한 점, 탈신분제 사회를 지향했다는 점, 자주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점, 근대화 사업을 적극 추진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통해 고종이 근대화를 지향한 개명군주라고 규정한다.
이에 반해 이영훈 교수는 고종황제를 개명군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고종황제가 남다른 지성과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다는 점과 더불어 세상을 울릴 만한 개혁을 직접 기획하고 집행음을 입증해야 하지만 이태진 교수는 추론을 유일한 증거로 삼을 뿐이라고 꼬집는다. 특히 이태진 교수가 사례로 든 사노비 세습 철폐는 민간에서 사노비의 세습이 중단된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명분에 불과한 정책이고, 영조의 민국이념을 계승한 것이 왜 근대지향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열국쟁패의 국제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_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이었는가?
김재호 교수는 대한제국의 재정은 모두 황제 손아귀에 있었고, 황실 관료들은 그 재정을 어떻게 나눠 먹을 것인지 고민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특히 내장원에 집중된 국가 재원은 대부분 인건비와 사치재 구입, 선물 등의 희사로 낭비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황실은 특권의 공급처였으며 황제가 매관매직의 중심에 있었던 점을 지적하면서 한마디로 대한제국의 재정은 황제의 사금고 그 자체였다고 비판한다.
이태진 교수는 내장원에 집중된 재정은 금융제도 확립을 위한 측면이 컸다고 반론한다. 그 예로 1899년 출범한 대한천일은행이 백동화 유통 지역을 확대해 인플레를 진정시켜 경제 전망을 밝게 했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황제 내입금 증가 현상이 1904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방책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_근대 경제성장은 식민지 시기에 시작했는가?
이태진 교수는 1896년 이후부터 대한제국의 농업 경제가 반등세로 돌아선 것은 이때부터 ‘근대 경제성장’이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미 한발 피해를 극복하고 외국미를 수입함으로써 기근도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었다는 점, 종두법 실시 등 근대 의술을 도입해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 수륜과에서 실시한 황무지 개간과 제언정비 사업이 농업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 경제성장’은 일제 시대가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이뤄지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했다.
김재호 교수는 경제 반전 현상을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 결과로 본 것은 ‘사실의 부족과 해석의 과잉’이라고 일축한다. 반전 시점이 대한제국기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반전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겹친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바로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서 찾는 것은 근시안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일제 식민 체제가 들어서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구체제’가 해체되고,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근대적 재산권 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 경제성장을 위한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