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아픔에서 나를 구해 줘
우리는 상실의 별에 갇혀 버렸다
『안녕을 말할 땐 천천히』는 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뿐 아니라 어린 나이에 사별을 겪은 청소년들의 혼란까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열네 살 애비의 엄마는 심장 이식 수술을 제때 받지 못해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상실 치유 모임에 가자고 하지만 애비는 타인을 만나고 아픔을 공유하는 일 자체를 거부한다. 억지로 간 모임에서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지닌 친구들을 만나지만 몇 년 전에 아빠를 잃은 구스타보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말을 하고, 크리스토퍼는 도무지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며 구스타보의 동생 커밀라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유일하게 친해지고 싶은 펠리시아 역시 어딘가 수상해 마음을 활짝 열 수가 없다. 애비는 치유 모임 담당 선생이라는 유진 또한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신에게 ‘슬픔의 방아쇠’가 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아픔임을 깨닫는다.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묵을 불편해하기도 하지요.”
선생님이 말했다.
그 어떤 사람은 구스타보겠지. ― 80면
“이제 어떻게 침묵이 구스타보에게 자극을 주는지, 구스타보를 불안하게 만드는지 알겠지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저마다 반응을 일으키게 만드는 방아쇠가 있어요. 애비, 너의 방아쇠는 다른 사람의 슬픔인 것 같구나.” ― 81면
애비와 동갑인 크리스토퍼 역시 상실 치유 모임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가 없다. 자신이 존경했던 구급대원 아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공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실 치유 모임에 온 아이들은 자신의 아픔 때문에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 버리려 한다.
난생처음 듣는 소리가 크리스토퍼에게서 나왔다. 흐느끼는 소리도, 울부짖는 소리도, 앓는 소리도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말라 버린 소리.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이 바싹 말라 고통만 남은 소리였다. ―168면
이렇게 세상과 단절되려 하는 아이들에게 유진 선생님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냥 도망쳐 버리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억눌린 슬픔은 언젠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고, 떠난 사람을 추억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슬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유진 선생님은 말한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꼐 떠난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서서히 ‘상실의 별’에 안녕을 고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떠난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다시 천천히 걷기 위하여
『안녕을 말할 땐 천천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슬픔에서 아주 천천히 빠져나와도 좋으니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며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이별의 고통을 잊기 위해 그 순간을 외면하는 선택은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떠난 사람을 마주하기란 고통스럽지만, 유진 선생님과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그 힘겨운 과정으로 한 발짝씩 나아간다.
아, 우리 목사님은 나에게 이런 말까지 했어요. ‘유진, 지나간 일이야. 잊어야 해.’ 목사님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여러분, 그냥 잊으면 안 됩니다.‘ ― 64면
서로 날을 세우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던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비로소 함께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실 치유 모임이 ’루저‘들의 모임이라 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애비가 크리스토퍼의 말에 공감의 눈물을 흘리고, 끊임없이 말하는 구스타보가 조용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상실 치유 모임 아이들 역시 거짓말을 한 펠리시아를 진정으로 모임에 받아들이며 똑같은 아픔이 아니더라도 서로를 보듬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갑자기 상실의 별에 갇혀 당황스럽거나, 하루라도 빨리 상실의 별에서 탈출하고 싶거나, 슬픔에 빠져 상실의 별에 머무르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안녕을 말할 땐 천천히』는 함께 다음 걸음을 천천히 내딛자고 손을 내밀어 주는 따스한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