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그림은 하나
대학 1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금껏 그곳에 머물며 활동하고 있는 지은이는 국내외에서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작품세계를 알려왔고 국내 미술시장에서 블루칩 작가로 통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2012년 갤러리현대에서 국내 전시로는 5년 만의 개인전은 평단과 대중 양쪽의 호평을 받으며 성황리에 열렸다.
언론인 출신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김원숙은 대학 1학년 때 좀 더 큰 세상에 나가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980년대부터 뉴욕 갤러리의 전속 화가가 되고 『뉴욕타임스』 등 유수 언론의 호평도 얻었지만 “나 자신이 아닌 그림은 그릴 수 없어” 갤러리를 떠나 현재까지 독자적인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갤러리 전속 계약을 끊은 이유 중 하나는 여성으로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삶과 화가 김원숙의 작품세계를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갤러리가 원하는, 소위 ‘상업적인’ 그림들은 그가 느끼기에 ‘내 것’ 같지 않았다. 미술계에서 성공하는 작가의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생활과 밀착되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만큼 그의 그림 속에는 일상이, 살아온 역사가 녹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20년간 이어진 첫 남편과의 결혼생활, 그와 함께 키운 입양한 두 아이, 이혼 후 현재 남편(그는 한국전쟁 고아로 얼마 전 KBS 정전 69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잊혀진 아이들」로 그의 사연이 소개된 바 있다)과의 만남, 그리고 일상 속에서 겪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모두 그녀의 그림 속에 있다.
책 속에서 그림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신발을 닦으며 아버지 신발 속에 발을 넣어봤던 기억, 목을 다친 남편이 고개를 들 수 없어 거울을 통해 함께 달을 구경한 일,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 느낀 질투라는 당혹스런 감정과 그 감정이 이내 애정으로 바뀌었던 것, 쉰 살이 되었을 때 이탈리아의 한 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같은 이야기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일상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이야깃거리나 생각할 거리를 끄집어내어 그림과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겪은 공허함, 전남편과 겪은 갈등,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의 기억,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까 두려웠던 어느 날 같은 개인적인 부침들이 과장되지 않게 담담한 어조로 펼쳐져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화가가 품고 있는 생각과 화가로서의 일상, 그림 주제에 관한 글들도 ‘김원숙’이라는 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글과 그림의 행복한 이중주
지은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말고도 독자 스스로 어떤 이야기가 떠오를 법하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는 이야기가 하나씩 피어오르기도 하고, 어릴 적 들은 옛날이야기 하나가 떠오르기도 한다. 김원숙은 미술사조의 유행에 관계없이 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그림을 그려왔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이런 김원숙 미술세계의 특징을 두고 “그의 작품 앞에 서면 그림을 본다는 것에 앞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그의 그림에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문화평론가 이어령 또한 그의 그림세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국말의 그림은 ‘그리움’이란 말 그리고 ‘글’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김원숙의 그림 속에는 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글로 쓴 것 같은 작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즐기고 그러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은 그 그림 저편에 순수한 손가락이 언뜻 언뜻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은이 자신도 그림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그림 본연의 가치를 되살려주는 그림들에 화가의 개인사와 생각들을 담은 담담하고 소박한 글이 함께한다.
“그림을 설명하는 글들은 아니다. 설명이 되는 일도 아니다. 그저 이런 그림들이 나오게 된 내 삶의 언저리를 이야기한 것이다. 일기 같은 글을 써놓고 그려놓은 그림 중에서 갖다 붙인 것도 있고, 그림을 그려놓고 보며 써내려간 것도 있다. 쓰다 보니 또 다른 이미지가 보여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있으니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는 다 같은 놀이다.” - 「책장을 열며」
이렇듯 이 책에 수록된 그의 그림과 글에서 어느 것이 주연이고 어느 것이 조연이랄 것도 없이, 그림과 글이 같은 위상을 갖고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오늘도 좋은 날’이라고 말해주는 그림들
지은이의 글과 그림은 따뜻하고 풍요롭다.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은이가 지닌 편안하고 긍정적인 기운 덕분이다. 책의 곳곳에서 “매일매일, 하루 종일 그리고 만들고 쓰는 일을 하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긍정의 힘이 독자에게 전염되는 것처럼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지은이의 한 친구는 그를 두고 “행복을 누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충분히 즐김으로써 행복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두고 한 말일 터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림과 글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지은이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모두가 ‘자화상’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 내 마음에 와 닿는 정경들, 나를 들뜨게 하는 것들, 내가 무서워하는 그림자들, 내가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모두 그림이 된다. ‘나’라는 작은 우주 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소리, 기억, 이야기, 그리움, 꿈 등의 이미지들이 화폭에 내려앉아 자기 자리들을 잡고 이어져서 그림이 만들어진다. 내가 살아내는 삶의 일기책이다.”
책은 모두 4개 장으로 이뤄져 있다. 1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한 기억과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2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상’은 일상에서 겪은 소소한 사건들과 그로부터 얻은 작은 깨달음들을 전한다. 3장 ‘삶에서 건져 올린 마법, 그림’은 화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화가로서의 삶과 그림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4장 ‘산을 넘고 또 넘으면, 내일’은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부침들과 그를 이겨내는 화가의 사는 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