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 고백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희떠운 말의 성찬 속에 삶이 실종되어버린 우리 시대, 예수의 제자들이 마음에 품고 몸으로 살아내야 할 참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왜 성경은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는가?
이 책은 목회자 겸 문학평론가인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의 모습을 제시한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얻은 귀한 가르침을 토대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목회 현장에서 늘 시대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온 저자는 신앙생활을 가리켜 지난한 조율의 과정이라 말한다. 수시로 하늘의 뜻에 자기 삶을 비춰보고 그 뜻을 기준으로 삶의 목표와 과정을 조율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조율하며 살기를 원하고 시대정신을 거슬러 삶의 근본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은 너무나 선명하고 실제적인 삶의 길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산상수훈이 진정 우리의 길이 되려면 실제로 그 길을 걷는 이들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앞서 걸었고 그분의 제자들이 따라 걸었던 그 길을 실제로 걷지 않는다면, 산상수훈은 더 이상 우리의 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앎은 있으나 삶은 사라진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매를 걷어붙이고 돌을 치우고 온갖 잡된 것들을 뽑아내어”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이 길을 다시 함께 걷자고 권면한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걸어감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렇듯 삶으로 증명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누군가의 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마땅히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하나님을 정의라 고백한다면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난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삶이고, 교회가 교인의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교회가 할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신자들의 삶과 교회의 구조 속에서 구현되느냐, 이것이 교회의 성장을 재는 척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손과 발, 시간과 정성을 주님께 드려서 말씀이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 세상에 말하게 해야 한다는 저자의 외침은 앎은 넘치나 삶은 증발해버린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확인하게 해준다.
* 비움과 채움의 신앙
산상수훈의 첫머리 팔복을 묵상하며 저자는 받는 복 대신 사는 복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무조건적으로 ‘받는 복’보다는 ‘사는 복’, 바로 복된 삶을 사는 비결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바로 비움과 채움이라는 두 가지 열쇠에 달려 있다. 비움의 관점에서 저자는 가난한 마음이란 습관적으로 어깨를 견주어보고 각(角)을 세우는 자세를 버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과 기꺼이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창고에 쌓아둔 ‘교만’의 칼과 ‘적의’의 창, ‘열등감’의 방패를 모두 쓸어내야 한다.
팔복이 신자들에게 주는 두 번째 열쇠로 저자는 ‘채움’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존재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가 그 존재를 규정하는 법이다. 따라서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그 존재 안에 성령님이 담겨 있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과 허망한 이기심만 가득하다면 그는 ‘신자’라 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팔복의 핵심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게 되는 나라도 이 세상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요, 세상 아픔에 눈물 흘리는 자를 위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온유한 자를 알아보고 그에게 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에 가득 채워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 정의를 위해 슬퍼하는 신앙
목회 현장에서 시대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저자의 설교와 글에는 언제나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용산 참사와 촛불 시위 등 우리 사회의 현안을 외면하지 않을 뿐더러 팔짱을 끼고 멀찍이 서서 고통의 원인을 해석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도 않는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를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요 교회의 본분이라 믿기 때문이다.
성경은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이 떨린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세우신다. 불의에 대한 고발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토라와 예언서를 꿰뚫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정의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이웃을 위해 울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땀 흘릴 때, 정의에 대한 갈망 때문에 허덕일 때, 비로소 예수의 십자가와 결합된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한 슬픔은 자기 연민을 환기시키는 값싼 슬픔이 아니라, 이렇듯 존재의 다른 차원을 여는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궁극적 위로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 평화를 이루는 신앙
‘평화’와 ‘생명’ 역시 저자의 설교와 글을 관통하는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다. 거대담론으로서의 화두가 아니라 일상의 삶, 언어와 소비 습관, 관계를 통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우선 밥을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마음, 배가 고파도 다른 지체들을 위해 기다려 줄줄 아는 마음, 산 짐승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밤과 도토리를 남겨두는 마음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고 평화의 문을 여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화는 힘으로 이루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애초에 저자는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평화는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고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영적인 바벨론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나눔과 섬김,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고, 평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으며 그분이 시작하셨으니 그분이 완성하실 것이라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의 태도이다. 우리는 헤아리고 낙심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심으라고 보냄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