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책 읽을 수 있으신지요?”
충주 성모학교에 가서, 맹아들 공부하는 것 돌아보고 오는 길에 교장수녀님께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맹인 학생들은 불 꺼진 방, 이불 속에서도 손으로 점자책을 더듬어 온갖 책을 다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눈썹 밑에 있는 눈도 눈이지만 맹인들 손끝도 놀라운 눈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본문 104쪽에서)
3년 동안 매일 보낸 작은 엽서들, 그 낮고 따뜻한 목소리의 깊은 여운
‘그림으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판화가 이철수가 두 번째 나뭇잎 편지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삼인)을 펴냈다. 지난해 말 출간되었던 첫 번째 나뭇잎 편지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이후 매일 써 보냈던 엽서들을 골라 엮었다.
“부끄러운 하루하루를 때로는 뉘우치는 심정으로, 때로는 살아 있음을 고마워하는 심정으로, 어떨 때는 사는 것이 그저 막막해서 넋두리하듯” 짧은 편지들을 보낸 지 3년째. 이번에 출간된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속의 일기처럼 적어 보낸 엽서들에는 직접 땅을 일궈 씨를 뿌리고 수확물을 거둬들여야 체득될 수 있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발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발견이 우리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마음자리였으며 어느 사이엔가 잊고 살았던 따뜻한 감동의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낮고 잔잔한 목소리들로 충만하다.
간략한 드로잉이 대부분인 그림들과 짧지만 부드러운 시구 같은 문장들이 어우러진 이 책에는 농사짓는 이철수의 땀과 언제나 쉬지 않는 판화 작업 그리고 낮은 이웃들과의 소통, 자연과의 교감 등 그가 일상에서 느낀 마음의 그때그때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작은 그림엽서임에도 그의 판화 작품만큼 여운이 깊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980년대 민중판화가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철수가 제천 박달재 부근으로 내려가 공부하듯이 농사를 지으며 판화 작업을 한 지 19년. 그는 세상의 소란함에서 한 발 물러나 한 해 농사의 소출의 많고 적음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농부처럼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 밖에서 생겨난 가치가 아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편편의 작은 것들에 대한 소박한 마음의 조각들에 대해 그는, 굳이 말하자면 그냥 국수가 아니라 손칼국수를 찾는 것 같은 그런 마음, 손으로 쓴 편지를 받고 가슴이 따뜻해지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작은 기억만큼 세상이 좀더 따뜻해지기를 소망하는 한편 그는 이렇게 매일 세상에 엽서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낸 엽서가 혼자 마음에 새기는 약속이 아니라 미더운 이웃이나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눈 약조 같은 것이고, 그를 통해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삶으로 내 그림을 책임지고, 내 그림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그의 오랜 바람이기에.
소박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이웃과 생명의 경이로움
지난 2005년 4월, 5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던 이철수는 그 초대글에서 ‘판화의 큰 여백이나 잔무늬 사이 빈 공간에서 마음자리를 찾아, 오솔길 같고 골목길 같은 당신만의 사유 공간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그의 판화 작품 속 ‘여백이나 잔무늬 사이’의 공간에 있을 법한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에 수록된 엽서 그림들은 대부분 칼로 새겨 다듬은, 작품을 위한 판화가 아니라 힘을 빼고 직접 그린 살가운 그림들이며, 글 또한 빽빽하게 때론 한두 줄을 하루하루 일상의 느낌에 따라 자박자박 손글씨로 써 넣었다. 때문에 이 책에 수록된 엽서들이 이철수의 판화 작품을 볼 때와는 다른 재미를 주는 한편, 그의 작품 세계―자연과의 교감, 일상에서 체득하는 선에 가까운 깨달음, 세상을 읽어내는 날카로움과 위트―를 더 솔직하게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어 보다 풍요롭게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리고 그 확장된 풍요로움이 읽는 이의 마음자리에 어느새 오솔길 같고 골목길 같은 사유의 길을 터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그림과 글감은 우리가 평소 눈여겨보지 않으면 까맣게 잊고 살 만큼 일상적이며 작고 소소한 것들이다. 한없이 느린 것 같지만 부지런히 자기 일을 하는 달팽이,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목침, 동네 식당 아주머니가 쥐어준 청국장 한 덩이, 곧 갈아엎어야 하는 밭 둑 위에 핀 작은 들꽃, 이웃집에서 함께 마신 차 한 잔 같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이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물들이 조용조용한 어조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작고 소소한 모든 것들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마치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을 것 같은 들판 한 구석의 작은 민들레일지라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뒤에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이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일 것이다. 이철수가 이 책에서 담담하게 보여주는 장면(촌로의 굵은 손마디와 굽은 허리에서는 농촌 사람들의 겨울나기의 고단함과 고적함이, 늦은 밤 떨어진 은행 알을 주워 모으는 동네 주정뱅이 친구는 마치 시인 같다)에 마음이 머무는 순간 문득 행간이 넓어지고 여백이 팽창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작은 것들에 대한 따뜻함이 일관되게 깔려 있는 이 책의 엽서들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주로 오막살이에 홀로 사는 촌로, 동네 국밥집 주인, 한겨울에 한뎃잠을 자는 노숙자들, 열매도 맺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초록들 말없는 겨울산과 끼니때의 밥상들 그리고 그의 아내와 가족들 등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야기 속에 담긴 소박한 삶의 메시지와 비유들을 읽어가다 보면 그렇게 무심코 지나쳐버린 일상 속에 그렇게 의미 있는 것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날이 갈수록 각박해져서 나를 지켜 담백하게 살기보다는 세상과 타협하고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손쉬운’ 세상을 향해 이철수는 매일매일 엽서를 써 보내고 있다. ‘살아 있는 기쁨이 그것만으로 넉넉하고, 작은 것에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