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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빨간 마후라 신영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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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23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748g | 157*218*30mm
ISBN13 9788925591681
ISBN10 8925591685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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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프롤로그 후회 없이 살았다

1장 빨간 마후라의 탄생
영화배우 신영균 | 아찔했던 키스의 추억 | 나의 살던 고향은 | 대배우의 꿈이 시작된 곳 | 첫 월급 700원 | 서울대 연극반 | 김선희, 평생의 연인

2장 100년 한국영화사가 나의 인생사
기억으로만 남은 영화 | 충무로 스타가 되다 | 신상옥, 100% 영화인 | 분단의 여배우 최은희 | 목숨을 건 촬영장 | 영화 인생 유일한 스캔들 | 만인의 연인이던 날들

3장 한국영화사에 남을 이름들
사랑해서 다시 한번, 전계현 | 김승호, 충무로의 영원한 아버지 | 스크린의 신사이자 만능 영화인 김진규 | 뜨거운 피를 가진 최무룡 | 신성일, 변함없는 맨발의 청춘 | 부끄럽지 않을 만큼 멋진 윤정희 | 뭇 남성의 마음을 흔든 문희 | 이름처럼 아름다운 고은아 | 김지미,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 합죽이 김희갑과 액션스타 박노식 | 남궁원과 윤일봉, 사라져가는 노병들

4장 배우는 극이 바뀔 때 역을 바꾼다
극장주, 사업가로 발돋움하다 | 명보제과, 신스볼링, 한주흥산 | SBS프로덕션에서 JIBS까지 | 정치로 이루고 싶던 꿈 | 한 그루의 예술나무, 문예련 | 스크린쿼터제, 자생과 경쟁 사이에서 | 박정희 대통령과 영화 검열 | 영화인을 위한 복지

5장 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진짜 빨간 마후라를 만났던 날 |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봉준호 |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에게 | 송강호와 이병헌, 믿고 기대하며 | 받은 사랑에 대한 작은 답례 | 잘 자라준 자녀들에게 고맙다 | 100세 시대 건강관리 | 마지막 꿈, 노인과 바다

에필로그 주고 가는 마음
평론 신영균, 한국영화의 영원한 남성 아이콘 _전찬일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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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그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일 당장 땅에 묻힌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다.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정말 후회가 없느냐고. 후회 없는 삶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맞는 말이다. 2020년 올해로 만 아흔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항로에서 어찌 잘한 일만 있겠는가. (중략) 순간순간 고달프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내일과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거북이걸음이자 황소걸음이었다. 덕분에 《파우스트》의 주인공과 달리 방황과 일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참으로 운이 좋은, 행복한 삶이었다. 감사한 일이다.
--- p.5~6 「프롤로그」 중에서

한국전쟁은 충무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53년 휴전 이후 사회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충무로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을 다룬 작품들이 잇달아 출시됐다. 전쟁영화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불리는 1960년대에도 꾸준히 제작됐다.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1964)도 한국전쟁이 낳은 찬란한 유산이다. 영화배우 신영균이란 이름 석 자를 가장 뜨겁게 달궈줬을 뿐 아니라, 이제 아흔이 넘은 노배우, 영화계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배우를 사람들이 잊지 않고 찾아주는 데도 〈빨간 마후라〉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 p.17~18, 「1장 빨간 마후라의 탄생」 중에서

요즘처럼 보고 듣고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1960~70년대,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당시 극장가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서울 시내 개봉관은 물론 변두리 재개봉관, 재재개봉관에도 영화팬들 이 북적댔다. 보통 사람들은 필름을 너무 많이 틀어 비가 죽죽 내리는 화면을 보면서 일상의 고단함을 달랬다. 1988년 제작된 〈시네마 천국〉 속 옛날 극장을 떠올려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 p.133, 「2장 100년 한국영화사가 나의 영화사」 중에서

“멋진 여배우.”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 VIP 시사회에서, 주연을 맡은 윤정희를 어떤 배우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간결하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이었다. 영화계 선배이자 동지인 내가 봐도 윤정희는 정말 그렇게나 멋진 배우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배우 중 죽는 순간까지도 배우일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윤정희를 말한다. (중략) 그런 그가 10년 넘게 알츠하이머를 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팬이 안타까워했다. 나는 윤 씨 가족과도 자주 왕래하고 있었기에 그의 투병 사실을 오래전에 알았지만,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나를 보면 “회장님, 저희 좋은 작품 하나 같이해야지요” 하며 반갑게 맞을 것만 같다.
--- p.190~191, 「3장 한국영화사에 남을 이름들」 중에서

애지중지 꾸려온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을 나는 2010년 사회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내 인생에 크나큰 용단이다. 부동산업자들이 극장 주변을 재개발하겠다며 “500억 원에 팔라”고 해도 꿈쩍 않던 나였다. 충무로는 한국영화의 고향인데, 유서 깊은 극장 하나쯤은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다. (중략) 명보 극장의 소유권은 신영균예술문화재단으로 넘어갔다. 후배 배우 안성기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화재단 측은, 극장 건물의 임대료로 10년째 영화인 및 자녀 지원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나는 공과 사를 엄격히 분리해, 재단 경비로는 커피 한잔도 마시지 않고 있다. 또 제주신영영화박물관도 함께 기증했다.
--- p.260~261, 「4장 배우는 극이 바뀔 때 역을 바꾼다」 중에서

1978년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 현장과 멀어졌지만, 꼭 하나 이루고 싶은 게 있다.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노인과 바다〉(1958) 같은 영화 한 편을 꼭 남기고 싶다는 것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년의 정점을 찍을 작품이었으면 한다. 나보다 두 살 어린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영원한 현역으로 뛰고 있다. 혹시 알겠나, 칸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을 수 있을지. (중략) 세월의 연륜이 담긴 캐릭터, 특히 제2의 고향인 제주 바다에서 고독한 어부의 내면을 표현해 보고 싶다. 어린 손자와 함께 지난 시간을 읊조리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영화인이나 지인,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났으면 한다. 투자도 직접 하겠다”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마땅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머지않은 시간 안에 마지막 소원을 꼭 이룰 수 있길 고대한다. 그것이 60년 영화 인생에 아름다운 마침표이자, 또 그간 나를 응원해 온 팬들에 대한 고별 선물이 될 테니 말이다.
--- p.357, 「5장 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후회 없이 살았다.”
화려한 스타, 성공한 사업가 그리고 500억 기부자…
| 한국영화 100년 지킴이, 아흔둘 노배우의 비망록 |


2019년은 한국영화사 100주년이었다. 그해 5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프랑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020년 2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까지 4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쾌거를 이뤘다. 〈기생충〉의 주연배우 송강호가 이야기하듯, “오늘날 한국영화가 이뤄낸 쾌거는 결코 특정 영화와 영화인만의 것이 아니라,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도 힘겹게 영화를 만들어온 선배들과 이 시대 모든 영화인의 것”이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불리는 1960년대, 제목만 들어도 ‘아~’ 할 만한 영화 중에 〈빨간 마후라〉(1964)와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이 있다. 서울 인구가 갓 400만이 넘었을 당시 각각 25만, 37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최소 1,000만 영화인 셈이다. 두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이가 바로 2020년 아흔둘을 맞은 원로배우 신영균이다. 그 시절 많게는 1년에 30여 편의 영화를 찍은 톱스타로서 30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긴 그는 배우로서 은퇴한 뒤에도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영화를 위해 힘썼다. 2011년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2020년엔 제56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를 ‘한국영화 100년 지킴이’로 부르는 이유다.
그는 평생 술, 담배와 도박을 멀리하고, 그 시절 ‘딴따라’로 불리며 사생활에서도 절제가 부족했던 다수의 연예인과 달리, 철저한 자기관리와 충실한 가정생활로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드높였다. 1999년에는 사재 100여억 원을 들여 국내 최초이자 최대 영화박물관인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개관했는데,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양성을 위해 명보극장과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및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했다. 그의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출범한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은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 등 각종 수익금으로 10년째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봉준호 감독이 태어나서 영화로 처음 받은 상이 바로 그가 연세대 재학 시절 만든 단편영화 〈백색인〉(1994)으로 받은 신영청소년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장려상이다. 2019년 11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아름다운 예술인상 영화예술인 부문에 선정된 봉 감독은, “아무것도 모르고 영화라는 걸 해보겠다고 덤벼들던 시기에 저를 가장 처음으로 격려해 준 것이 신영청소년영화제였다. 25년이 지나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아름다운예술인상을 받게 된 게 길고도 의미 있는 인연이라 더 큰 기쁨이 있는 것 같다”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한국영화를 빛낸 남성 영화배우 10인
영화 같은 삶, 후회는 없다.


2019년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에서 영화평론가 전찬일은 ‘한국영화 100년을 빛낸 남성 스타 10인’을 꼽았다. ‘한국영화사의 신화적 출발점’인 나운규, ‘한국영화의 영원한 아버지 상’ 김승호, ‘스크린의 신사이자 만능 영화인’ 김진규,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 신영균, ‘비교 불가의 대한민국 대표 스타 아이콘’ 신성일, ‘보통 사람의 얼굴을 지닌, 환상적 스타-연기자 명콤비’ 안성기와 박중훈, ‘19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한석규, ‘천의무봉, 전혀 다른 세 모습의 남자’ 송강호, ‘신영균의 최적자’ 최민식, ‘국제성을 겸비한 국내 유일의 월드 스타-연기자’ 이병헌까지다.
이처럼 신영균은 결코 짧지 않은 100년의 한국영화사에서 추린 단 10인의 남성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우직한 시골 머슴부터 문제적 인간으로서의 임금, 비극적인 영웅과 멜로드라마의 주인공까지 폭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연기력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캐릭터를 선보였다. 다만 전찬일이 말하듯, 연기와 캐릭터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여느 배우와 달리 신영균은 그 너머의 삶으로 관계자들은 물론 대중들의 사랑과 존경을 두루 누리는 스타-배우가 되었다.
《엔딩 크레딧》은 신영균의 개인사부터 데뷔 여정을 담은 ‘1장 빨간 마후라의 탄생’, 한국영화의 전성기와 그의 삶을 엮은 ‘2장 100년 한국영화사가 나의 인생사’,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는 그 시절 영화인들의 삶을 기록한 ‘3장 한국영화사에 남을 이름들’, 배우에서 사업가 그리고 기부자로서 마무리되는 그의 여정을 담은 ‘4장 배우는 극이 바뀔 때 역을 바꾼다’, 배우 신영균의 마지막 꿈과 소망을 소개한 ‘5장 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까지 5장으로 구성된다. 배우 신영균이 한국영화에 남긴 발자취와 의의를 들여다보는 영화평론가 전찬일의 평론도 담겼다.
지난 세월 자신이 받은 탤런트를 남김없이 쏟아왔으나 괜히 객담만 늘어놓은 건 아닐까 싶다는 그이지만, 그의 인생이야말로 고난의 20세기를 살아온 많은 한국인의 얼굴이 아닐까 싶다. 이원종 전 서울시장의 말처럼, “선진국의 특징은 기록문화다. 영광과 치욕의 순간을 모두 남겨야” 한다. 한국영화 전성기를 지냈던 그 시절 배우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이 시점, “후회 없이 살았다”는 한국영화 100년 지킴이 신영균의 비망록이 더 없이 소중한 이유다.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무작정 영화를 만들겠다고 덤벼들던 시기, 나를 가장 처음으로 알아봐준 것이 ‘신영청소년영화제’다. 대학 시절 만든 [백색인]으로 받은 단편영화 부문 장려상은 크나큰 위로이자 격려였다. 신영균 선생님은 한국영화사는 물론, 내 영화 인생에도 기록될 분이다. 많은 창작가와 예술가에게 더 없는 힘이 되어주신 그의 비망록을 읽는 내 마음도 기쁘다.”
- 봉준호 (영화감독)
“2019년은 한국영화사 100주년이었다. 2020년 현재 아흔둘인 신영균 선배님이야말로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이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불리던 1960~70년대 활약하신 수많은 선배 배우들이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그 시절 한국영화와 배우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엔딩 크레딧》이 더없이 반가운 이유다.”
- 안성기 (영화배우)
“신영균 선배님과의 인연은 10년쯤 된 것 같다. 어느 영화 시상식에선가 ‘강호야, 수상 축하한다’ 하시며 내 이름을 부르시던 그 목소리가 참 정겨웠다. 오늘날 한국영화가 이뤄낸 쾌거는 결코 특정 영화와 영화인만의 것이 아니다.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도 힘겹게 영화를 만들어온 모든 영화인의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 송강호 (영화배우)
“존경하는 신영균 선생님의 책을 통해 영화라는 명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반세기 동안 배우이자 대한민국 영화계를 이끈 대선배로,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늘 귀감이 되고 감사하다. 엔딩 크레딧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지만, 선생님의 인생 기록이 담긴 이 책 《엔딩 크레딧》은 영화를 꿈꾸는 많은 이에게 시작을 알려줄 것이다 .”
- 이병헌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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