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신앙에서 산악신앙과 함께 호랑이는 산군으로 종교적 대상에 오르고 있다. 현실계에서는 인간을 잡아먹는 공포의 맹수로 호총에 얽힌 부전적인 속신을 낳았지만 상징계에서는 실재하는 동물이면서도 용이나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수의 하나로 오랫동안 인간의 숭앙대상이 되어왔다. 심지어 불가에서는 자기 몸을 던져 병든 호랑이를 살리는 사신양호의 설화까지 생겨났다. 이 같이 호랑이는 부정과 긍정의 모순을 안고 있는 양가물로서 호랑이의 사냥꾼에 대해서 곤장의 형벌과 함께 비단의 상금을 내리는 사또의 희귀한 재판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종교적 층위에서는 산군을 잡은 포수에게는 분명 형벌을 내려야 하고 한편 인간을 잡아먹는 동물을 잡아 인명을 지키고 귀한 호피를 얻어 경제적 이익까지 챙긴 포수는 마땅히 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 「호랑이의 한중일 문화코드」 중에서
한중일의 공통된 문화코드를 읽는 비교문화상징 사전, ‘십이지신’ 시리즈 첫 권
유한킴벌리는 한·중·일의 문명사적 소명을 재발견하고, 동북아 지역은 물론 우리 지구촌에 ‘평화와 화해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한·중·일 문화의 동질성과 고유성을 연구하는 문화 유전자 작업의 장기 과제의 하나로 ‘한·중·일 비교문화상징사전 발간사업’을 진행해왔다. 이 사업은 유한킴벌리가 21세기 동북아 시대에 맞는 우리 문화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강화하고, 사회의 근본이 되는 인문학을 살리는 데 기여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이미 ‘사군자와 세한삼우’를 소재로 한 5권의 책을 완성했으며, 이어 ‘십이지신(十二支-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를 소재로 한 한·중·일 비교문화 상징사전 시리즈가 계획되었다. 십이지는 예로부터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쥐나 토끼, 호랑이, 말 등 십이지 동물들이 한국, 중국, 일본에서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오랫동안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어떻게 일상생활과 문화에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한?중?일을 관통하는 문화적 코드를 관망할 수 있다. 유한킴벌리의 지원을 받아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가 앞으로 진행될 이 시리즈의 첫 권이 2010년 경인년을 맞아 이번에 발행된 『십이지신 호랑이』다.
그 많던 호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마음과 생활 곳곳에 묻어 있는 호랑이를 찾아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로 정해졌듯이, 호랑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 중 하나다. 예전에 우리나라에는 많은 호랑이가 살았으며,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풍성했다. 지금은 한반도 전역에서 호랑이가 거의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옛이야기와 우리의 문화 속에 녹아 있다. 중국의 대문호이며 사상가 노신은 한국인을 만나면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정도다. 최남선도 ‘조선을 호담국虎談國’이라 할 만큼 설화에서도 호랑이 이야기가 으뜸이다. 한민족에게 호랑이가 끼친 영향과 기능은 다양했다. 우선 고조선 이전부터 호랑이를 신으로 숭상한 사실이 있었음은 발굴된 토우를 보거나 동예에서는 호랑이를 제사했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민간신앙에서 산신이니 산군자 등 신성으로 인식되어오고 있다.
이 책은 호랑이 생태와 어원, 호랑이와 관련된 민담과 설화, 신앙, 예술, 일상생활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한국의 독특한 호랑이문화는 호랑이를 매우 다채롭게 표현했다. 두려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매우 우습게 또는 친근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민화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데, 민화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호랑이는 풍성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또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은 ‘창귀’가 된다는 믿음에서, 그 ‘창귀’를 막기 위한 ‘호식장’과 ‘호식총’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장례와 무덤 양식도 우리가 잘 듣지 못했던 호랑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이다. 민담, 예술, 종교,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든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호랑이의 나라, 한국과 중국, 일본의 호랑이 이야기
호랑이와 한중일의 문화코드
호랑이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중에서 고대 문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호랑이를 그림이나 문양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중국, 호랑이의 나라로 불릴 만큼 호랑이와 관련된 사상과 예술품이 많이 남아 있는 한국, 비록 호랑이가 실제로 서식하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한국 못지않게 이와 관련된 것이 많은 일본 이렇게 삼국의 전통예술에서 호랑이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신화와 상징은 현실체계(자연)와 관념체계의 충동이나 모순을 조정하고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곧 인간이 창조해낸 문화이며 상징의 역할이다. 그리고 현실계와는 달리 쳀러한 문화들은 특정한 지역이나 시대를 넘어 인간의 행동과 삶의 양식에 현실 못지않은 영향을 준다. 비근한 예로 일본에는 실제 호랑이가 서식한 적이 없지만 12지를 비롯해 음양오행설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호랑이의 상징문화를 공유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호랑이는 아시아 문화의 엠블렘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우리는 단군신화의 호랑이 이야기와 당나라 때의 기담소설인 이경량李景亮의 인호전人虎傳을 읽어 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호랑이 대 인간”의 숨어 있는 문화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 왜 호랑이는 인간이 되지 못했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호랑이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낸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극기심이 없으면 그리고 야생적인 자연의 힘보다는 참고 견디고 자신을 다스리는 정신력이 없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인호전은 거꾸로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호랑이가 되었는가의 정반대의 이야기다. 촉망받던 젊은 선비 이징李徵이 자신의 성질을 누르지 못하고 포악한 행동을 하던 끝에 시문詩文과 가족을 멀리하고 유랑하던 중 호랑이가 된다는 그 이야기의 설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호랑이와 구별되는 덕목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시문과 가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유교의 색채가 강하다. 이 인호전이 개화기 때의 일본작가 나카지마中島 敦에 의하여 번안되어 『산월기山月記』라는 소설이 되고 현재에도 일본의 국어교과서에 게재되어 널리 읽혀진다는 사실은 일본의 탈아주의적 근대화가 서구화 일변도의 것만이 아니었음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호랑이 한 마리가 증언하는 한중일의 문화를 좀 더 넓혀 가면 용과 봉황새와 호랑이로 이루어진 아시아 삼국의 생태지도 문화지도가 그려진다.
서사문학에서도 호랑이는 한중일을 관통하면서 조금씩 윤색되어가는 미묘한 굴절과정을 보여주면서 삼국의 문화유전자의 지도를 그려낸다. 지금까지 호랑이는 용, 봉황과 함께 중국의 문화를 형성해온 상징물로 연구되어왔다. 아시아 생태론生態論을 토대로 한 하마타濱田英作 교수의 연구와 그를 정리하여 용봉호(龍鳳虎)의 상징수를 통해 본 중국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아윤습亞濕潤 아시아 지대-북방, 수렵생활형, 잡곡재배-호랑이虎
-건습乾燥 아시아지대-서에서 동으로 뻗은 지역, 유목생활형과 오아시스 생활형-봉鳳
-윤습濕潤 아시아지대-남방, 농경생활형과 해양 생활형 도작 농경稻作農耕-용龍
그러나 이러한 상징을 한중일 삼국으로 확장하면 보다 유효한 호랑이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여기에 처음으로 시도되는 호랑이 삼국비교 문화는 새로운 동북아의 문화 패러다임을 펼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