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과 금기를 넘어서는 부활을 향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으로, 기독교 교리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둥이다. 저자는 부활을 ‘신앙의 눈’으로 옹호한 책은 많지만, 합리적 사고로 파헤친 시도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험을 통한 과학적 검증은 불가능하겠지만,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음에도 아직 그런 시도가 아예 없었다. 이 책은 그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는 『신의 변명』에 이어 성역과 금기를 넘어서는 성숙한 기독교를 지향하는 ‘옥성호의 빅퀘스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으로 집필되었다. 저자는 합리성과 상식에 비춰 부활이라는 매우 이례적이고 반복될 수 없는 한 사건의 검증을 시도한다. 저자에게 부활은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고백 대신, 압도적 증거와 정밀한 추적이 필요한 주제로, 부활이 과연 역사인지 아니면 믿음의 고백에 불과한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예수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몸 부활파의 승리
부활을 기록한 최초의 신약성경은 바울 서신서다.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 부활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이다. 저자는 바울이 ‘몸 부활’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왜 모든 면에서 철저히 바울의 입장(신학)을 고수한 복음서가 부활에 관련해서는 바울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지 묻는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몸 부활로 서술하는데, 메시지에 ‘권위’를 담기 위해 베드로를 끌어들인다. 그들에게는 예수와 직접 연결된 ‘권위의 기원’, 부활한 예수와 극적인 만남을 가진 베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도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를 미련하고 비겁한 무지렁이로 그리면서도, 예수의 몸 부활의 진위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필요했다.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견해가 충돌하면서 몸으로 부활한 예수가 필요해졌고, 복음서를 거치면서 부활한 예수는 아주 복잡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예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바울의 부활장과 복음서 사이의 메꿀 수 없는 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복음서 간의 심각한 모순을 조화롭게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다시 말해 저자에 따르면,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자 한 바울 세력 중 한 분파에 의해서 예수의 부활은 복음서를 거치면서 서서히 몸 부활로 자리 잡았고, 이후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로 정착한다. 예수의 몸 부활을 강조하는 복음서는 주류가 되었고, 2세기부터 몸 부활 외에 다른 부활을 주장하는 부류는 다 이단이 되었다.
히브리 성경 또는 구약은 메시아 예수와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히브리 성경의 모든 스토리는 다 ‘예수’를 가리킨다. 기독교에서는 히브리 성경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수에 관한 예언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예수에 관한 예언은 예수의 탄생과 함께 현실이 되었다. 신약성경의 처음이 복음서보다 훨씬 전에 쓰인 바울 서신서가 아니라, 예수의 족보를 나열하는 마태복음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그렇기에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의 DNA를 우리는 히브리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모든 DNA는 하나도 예외 없이 히브리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부활도 예외가 아닌데, 예수가 메시아라고 확신한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먼저, ‘성경대로’라는 구절을 넣었다. 즉 예수의 부활에 관한 구체적인 예언이 히브리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히브리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히브리 성경이 그리는 메시아는 적의 손에 잡혀서 비참하게 죽는 존재가 아니라, 승리를 가져다주는 위대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메시아가 죽는다는 예언이 없는데, 메시아가 다시 살아난다는 예언이 있을 리 없으며, 결국 예수의 DNA는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 성경에 비추어볼 때 부활의 DNA는 메시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 히브리 성경에 아예 없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는?
기독교인 중에는 부활을 은유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부활을 서술한 신약성경 저자 중 누구도 부활을 은유나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에게 부활은 실제로 발생한 역사였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에게 부활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저자는 바울처럼 역사라고 믿었을 수도 있지만, 단지 신앙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당시 유통되던 전승에 적절하게 살을 붙이는 식으로 창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부활의 역사성을 믿었는지 여부를 떠나, 부활을 ‘역사’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활은 증거가 전무한 픽션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한다. 오히려 저자는 “나의 ‘지금’이 풍성한 생명을 품은 순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부활의 의미를 찾는다. 부활 이야기가 나의 ‘지금’을 더 풍성하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부활이 가진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 그런 삶을 사는 데 부활이 중요한 동기가 된다면, 부활 신앙에 담긴 숨은 가치는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부활은 대부분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의 마지노선이자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교리’라는 절대반지이며,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가를 가르는 리트머스 종이다. 성역과 금기를 넘어서는 저자의 도전적 질문은 부활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며, 이 땅의 기독교가 더욱 성숙한 종교로 나아가도록 추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