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학자인 정약용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마재 마을에서 태어났다. 동네에서 못 말리는 개구쟁이였지만, 훌륭한 학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에서 자란 덕에 자연스레 책을 많이 접하며 의젓하면서도 명랑하게 자랐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정약용은 네 살에 《천자문》을 익히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삼미자집》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평생 500여 권의 책을 쓴 대문학가이자 저술가였다. 또한 배다리와 수원 화성을 설계한 건축 설계사였으며, 거중기 · 유형거 · 녹로와 같은 기구를 만든 발명가였다. 뿐만 아니라 《마과회통》을 지은 의학자이자 수많은 살인 사건을 해결한 탐정이었고, 현명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줄 아는 행정가였다.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한 천재였다는 것 외에도 정약용의 위대한 점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이 정해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지만, 양반인 정약용은 어릴 때부터 목수나 사냥꾼, 대장장이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의 아이들과도 허물없이 잘 지냈다. 나랏일에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던 조선 시대였지만, 정약용은 수원 화성을 지을 때 백성에게 노동의 양만큼 대가를 지불하자고 임금에게 건의하였으며, 암행어사 시절에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자의 비리도 거침없이 고발해 백성의 고통을 덜었다. 또한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무고한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훗날 모함을 받아 가게 된 유배지에서도 정약용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학문을 넓혀 갔다. 그렇게 그는 나라의 부조리한 제도를 개혁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살게 만들기 위해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의 책을 펴내며 죽는 날까지 힘썼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그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 평생 백성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 우리 역사의 찬란한 별, 정약용. 다재다능한 그의 삶을 지금부터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