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서구 열강에 무릎을 꿇은 시기에 서구적 방법을 중국에 도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큰 중격이었다. 공화국 시절 초기인 1911년, 쉼없이 새로운 사상이 베이징에 몰려왔으며, 베이징은 다양한 학문 연구 그룹을 배태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배경에서 중국 청년들의 의식구조는 천천히 진보하고 있었다. 드디어 턱없이 부족한 현장연구원의 양성을 위해 1916년에 중국지질조사소가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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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수천 년의 생생한 역사적 전통을 소유하고 있으며,그 전통은 이 나라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관되게 지속된느 문명을 지니도록 해주었다 중국이 과거와의 관계를 지금까지도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밀접한 방식으로 유지해 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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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은, 하(夏)왕조(BC 2000-1600년경), 상(商)왕조(BC 1600-1050년경), 주(周)왕조(BC 1050-221년경)를 언급하면서, 그 주변국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바가 없다. 그 기록에 따를 때 이 세 왕조는 중국의 선사시대 말기와 문명시대 초기를 나타낸다. 결국 전승 사료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는 문명세계의 요람이라는 황허 요역에 자리잡은 이 세 왕조로 요약된다.
1928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안양의 발굴작업은 이들 세 왕조의 중심에 있던 안양이 문명의 근원지라는 이상적인 시각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오랫동안 전설상의 국가라고 여겨왔던 상나라가 실재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게 된 것은 이 유적지를 발견하고 나서였다. 이곳은 상나라 사람들이 BC 1300년경에서 1050년 사이에 건설한 마지막 수도였던 것이다.
한창 성숙기에 접어든 청동기 시대를 명백하게 증명해 주는 안양은 중국의 전통 요소들을 지닌다는 점에서 소중한 과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질문, 즉 정교한 금속주조술의 기원은 어디인가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 서방아시아에서 영향받았을 것이라는 리 지의 주장은, 국가의 명예를 생각한 후계자들에게 외면당했고, 그 문제는 오늘날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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