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중고도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 16세기 큰선비 하서 김인후를 만나다

백승종 저 | 돌베개 | 2003년 07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정가
18,000
중고판매가
6,000 (67% 할인)
상태?
사용 흔적 약간 있으나, 대체적으로 손상 없는 상품
YES포인트
구매 시 참고사항
  • 중고샵 판매자가 직접 등록/판매하는 상품으로 판매자가 해당 상품과 내용에 모든 책임을 집니다.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3년 07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734g | 153*224*30mm
ISBN13 9788971991633
ISBN10 8971991631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약간 있으나, 대체적으로 손상 없는 상품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일세의 거유(巨儒) 하서 김인후를 만나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여는 글_하서의 전자우편
백승종 교수께
하서 김인후
하서의 한시
대화체 역사 서술
16세기 조선 선비의 일상세계
하서의 문집

1. 집안
선비의 한평생
아내의 자리
아들딸
선비의 집

2. 조선의 하늘과 땅
한 해도 사계절을
한양 길

3. 인간(人間)에서
스승과 벗
과거 급제하던 날
<묵죽도>의 맹세

4. 대나무 숲
귀거래사
시와 술, 그리고 일상의 정치

5. 천명도

마무리하는 글_화표학의 노래

부록
1. 김인후의 졸기
2. 긴인후 연표
3. 북한에서의 김인후 연구 자료

미주
연구 자료 및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백승종 지금까지 님과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한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서 그게 무엇일지, 도리어 내가 궁금하오.

백승종 첫째, 님이 본가의 살림을 직접 맡으신 것은 서른다섯 살쯤이었다는 점입니다. 결혼한 지 20여 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당시 님의 부친은 칠순 노인이었습니다. 님은 서른한 살 되던 1540년부터 4년 가량 벼슬살이로 분주하였습니다. 그러한 관계로 살림살이의 승계가 다소 늦어졌다고 여겨집니다. 보통은 부친이 환갑을 넘길 때쯤이면 살림의 권한이 아들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19세기 이전에는 서양에서도 대체로 그런 편이었습니다.

둘째, 님의 집안은 경제 사정이 비교적 좋은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순창에서 임시로 거처하던 동안에도 궁핍하였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대맥동 본가로 되돌아온 지 수년 만에 새 집 짓기에 착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위에서 검토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장성의 본가나 서울의 평천장은 규모가 대단하였습니다. 특히 평천장에는 각종 진귀한 동식물도 다수 있었습니다.
---pp. 137~138
백승종 음과 양의 상호 관계를 님은 병렬적, 평등 관계로 이해하십니까? 아니면 수직적인 불평등 관계로 보십니까?

하서 남녀는 본래 불평등하다.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리. 백 교수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하려 하오. "내가(고금역사를 살펴) 보았더니 흥하고 망하는 게 모두 부인에게 달렸더구나. 매희(妹喜: 하나라 걸왕의 후궁)와 달기(은나라 주왕의 후궁)가 궁궐에 들어오자 나라가 넘어졌네. 미덕은 없고 한갓 음황(淫荒)뿐이었다네."(『하서』1: 557)

백승종 여성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말씀인 줄로 알겠습니다.

하서그렇다오, 조화로운 부부 관계야말로 바로 '치화'(治化), (『하서』2: 303) 즉 올바른 다스림의 근본이라오.

백승종 님이 사시던 16세기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사회적 통념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가령 님이 쓰신 글을 보더라도 그 가운데 "아버지 휘(諱)는 환(丸), 벼슬은 금구훈도(金溝訓導)라. 어머니는 직산 김씨 (稷山金氏) 세자좌사경(世子左司經) 지효(知孝)의 손녀"(『하서』3: 113)라고 말씀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서 내 조부모님에 관해서 그렇게 기록한 적이 있었소. 거기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오?

백승종 '어머니는'이라고 말문을 여셨으므로, 저는 어머니의 이름이 나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정체성은 벼슬이 있는 그의 할아버지, '세자좌사겨 지효'라는 분을 통해서만 확인될 뿐입니다.
---p. 70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1. 하서, 성리학과 도학(道學)을 이은 조선 중기 지성사의 큰 맥
많은 선비들에게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가 귀감이 되었을 만큼 하서는 삶과 철학에 있어 당대의 표본이 된 큰선비였다. 19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고, 1540년(중종 35) 31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1543년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가기 전까지 하서의 관직생활은 단 3~4년에 불과했다. 이후 1545년(인종 1)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1560년 임종하기 전까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으니 그의 산림 은거는 15년이나 지속된 셈이다.

성리학적 이해 수준이 낮았던 당시에 마흔이 넘어 성리 철학을 궁구한 하서는 10여 년간 도(道)와 기(氣)의 분리 문제, 리(理)와 기(氣)의 상호관계, 그리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문제에 천착했고 이 문제들은 17세기 이후 조선 성리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또 뒷날 사칠논변(四七論辨: 사단과 칠정에 관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토론)을 촉발시켰다고도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자료인 〈천명도〉를 남겼으며, 『주자의례』(朱子儀禮)의 간행에 열정을 기울이는 한편 상례와 제례에 있어 중국 고대의 예제를 엄수하려고 한 근본주의적 태도를 지녀 17세기에 융성했던 예학의 싹을 틔웠다.


2. 하서를 통해 발견하는 16세기 조선 선비의 중층적 내면
훌륭한 학자의 풍모를 지니고 담박하면서도 고매한 삶을 산 하서의 일생은 일면 단선적으로 보이지만 복합적이고 다양한 국면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책은 이원론(二元論)과 일원론(一元論)을 오가며 끊임없이 잠심(潛心)하고 주리(主理)의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주기(主氣)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던 하서의 모습에서 조선 중기 철학자들의 복합적인 모습을 발견해내고 있다.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충실히 계승한 철학자이자 도교나 불교 같은 이단을 배척한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평가받는 하서가 점괘를 즐겨 보고 ?표연히 날아든 하늘 신선?(「화표학」, 439쪽)이 되고자 한때 장생술을 공부한 장면을 접하면 독자들은, 무술적(巫術的) 사생관(死生觀)이나 도교적(道敎的) 세계관이 성리학적 세계관과 혼합되어 있는 16세기 선비들의 중층적 내면과 조우하게 된다.

15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조선 선비들의 성리학설에 대한 이해는 가히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성리 철학은 하서가 살던 시대에 최고의 첨단학문이었고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삼남 지방의 선비들 사이에서 약간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일재(一齋) 이항(李恒),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등과 하서가 젊은 시절 사상적 차이 없이 절친하게 교유하다가 나이가 들고 지향하는 학문의 길이 달라지면서 벌인 활발한 학술 토론은 주자성리학 일색이 아니었던 조선 중기 사상계의 흐름을 전해주는 중요한 장면들이다.


3. 촘촘하게 되살린 조선 중기 선비사회의 모습
조선 선비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평생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평생 경전 공부에 매달리는 것도 어려웠으며 요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해도 미관말직을 얻어 일하다가 겨우 서너 해 국록(國祿)을 받다가 그만두는 게 다반사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선비들이 평생 유식(遊食)하였던 셈이다. 따라서 당시 선비들에게 인간관계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3~4년에 걸친 관직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하서에게도 인간관계는 생활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했다. 이 책은 하서를 비롯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취미생활과 다양한 교유의 장, 17세기 문중과 같은 혈연 조직이 등장하기 전의 집안끼리의 연대, 계(契)와 시사(詩社)로 엮어진 선비들간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그들의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 과거시험을 둘러싼 다양한 경험과 합격자들 상호간의 우의와 사회적 결속, 벼슬살이의 실제 등 그물코처럼 얽힌 선비들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촘촘히 복원해내 조선 중기 선비사회를 치밀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하서가 맺어온 사회적 관계를 살펴보면 조선 중기를 풍미했던 주요 선비들이나 사상가들과 조우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하서는 스승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윤사율(尹士栗), 유희춘(柳希春), 나세찬(羅世纘), 임형수(林亨洙) 등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들과 정치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의 장인 과거 시험장은 사회적 연망을 보다 광범위하게, 보다 촘촘하게 구축할 기회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각종 백일장은 물론 문과 초시, 소과 초시를 보면서 동향 및 타향의 선비들과 교유의 기회를 가졌고, 서경덕과 이황 같은 대선비들은 성균관에서 사귀었다. 송순(宋純), 성운(成運), 서경덕, 백인걸(白仁傑), 정유길(鄭惟吉) 등 소과?문과 동년 들과 각종 계(契)를 맺어 관계를 유지했으며 귀향 후에는 시회(詩會)나 조촐한 주연(酒宴)을 열어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등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하서를 비롯한 조선 선비들에게 이런 형태의 인간적 유대는 사회적 자본이었으며 향촌사회뿐만 아니라 사림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상적 권력의 실체였다. 전라도 무장의 늙은 유생 안서순(安瑞順)이 상소를 올려서 집권층을 날카롭게 비판한 안서순 사건(하서는 배후조종자로 지목된다)은 산림에 은거한 하서의 일상적인 정치력이 발휘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4. 하서의 인간적인 풍모와 내면적인 고통
인종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토록 간직했고 부모에 대한 효(孝)를 한시도 잊지 않았던 하서는, 유교적 덕목인 절의(節義)와 도덕(道德)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안으로는 효(孝)를 밖으로는 충(忠)을 실현한 유교적인 인간 하서의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다섯 마당으로 하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이 책은 하서의 일상생활과 관직생활을 생생하게 되살리면서 생활인으로서의 하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 마당은 가족관계, 친족관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일상을 이야기하는 첫째 마당, 우주와 자연에 관한 하서의 인식을 다루고 있는 둘째 마당, 스승?벗?신하로서 하서가 맺은 관계망을 살펴보는 셋째 마당, 관직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는 생활을 그린 넷째 마당, 하서의 성리철학의 정수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다섯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서를 둘러싼 사적 · 공적인 삶은 마당과 마당을 넘나들면서 실감나게 되살아난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아내 윤씨와 시를 주고받으며 지극한 사랑을 나눈 충실한 지아비로서, 요절한 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한 아버지로서, 홀로 남겨진 사위 양자징(梁子澄)과 술로 벗하며 애틋한 연민의 정을 나눈 장인으로서, 그리고 멀리 귀양 간 친구를 향해 철석같이 굳은 신의를 보여준 벗으로서의 하서의 깊이 있는 인간적인 풍모를 만날 수 있다. 또한 10년도 넘게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감내해야만 했던 고통과 좌절,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만 시승(詩僧)들과의 교류, 시와 술에 대한 무절제에 가까운 집착과 사랑, 벼슬을 혐오하고 있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사로잡고 있던 일종의 미련 등 그가 겪은 내면적 고통과 번뇌를 포함한 생의 다양한 국면들이 대화체의 서술 방식 속에서 생동감 있게 전해진다.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6,0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