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書畵에 대한 고담준론보다는 욕망 가득한 예술의 뒷골목을 통해
조선의 삶과 문화를 다시 읽는다
* 왕희지 때의 것이란 얘길 듣고 죽은 파리도 비싼 값을 치르고 산 이조묵
* 친구 정선에게 얻은 그림을 북경 인편에 팔아 진귀한 중국책을 구한 시인 이병연
* 중인 신분으로 당대 최고의 선비화가 윤두서의 감식안에 도전장을 내민 김광국
* 그 유명한 고개지의 그림에 중국 황제와 나란히 인장을 찍은 안기
* 풍속화의 해학미를 추구한 예술 후원가 정조
* 기생 그림을 잘 그린 화가에게 상을 내린 연산군, 조선 예술의 제도적 발전에 기여?
* 컬렉션으로 가산을 탕진한 양반 컬렉터 김광수 vs. 연암의 통렬한 비판
* 중인의 예술세계를 의도적으로 애호한 중인 컬렉터 유최진과 라기
조선 최고의 그림 수집가였던 왕들
그림은 무엇보다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수장을 시도해볼 수 있었던 사치 영역이었던 만큼, 조선시대 서화 수장의 중심에는 왕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책이 왕실 수장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첫 장은 몽유도원도의 화가 안견을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올려놓은 주인공이자, 그림 사랑이 대단해 신숙주가 장문의 글로 밝혀놓기도 했던 ‘안평대군’을 다룬다. 형 수양대군과의 권력다툼 끝에 3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고, 세조 즉위 후에는 역사에서 이름조차 지워질 만큼 안평대군의 정치적 삶은 불운했으나, 조선초기 컬렉터로서 그의 이름은 우뚝했다. 안평대군은 10대부터 서화를 사 모았다. 그 컬렉션 내용은 신숙주의 『보한재집』 「화기」에서 전하는데, 그 첫머리를 보면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은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가지고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다. 그중에서 좋은 것은 골라 표구를 해 소장했다. 어느 날 이것들을 모두 꺼내 나(신숙주)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들을 좋아하는데, 이것 역시 병이오. 열심히 찾고 널리 찾기를 10여 년 한 후에 이만치 얻었소. 아하!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여지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으니 대저 오늘의 이룸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될는지 어찌 알랴.’”
중국 회화사상 최고봉인 고개지의 작품을 비롯해 당나라의 오도자·왕유, 송나라의 곽충서·이공린·소동파·곽희·곽충서·문동, 원나라의 조맹부·선우추·유백희·나치천·마원에 이르기까지 안평대군의 컬렉션은 국제적 방대함을 자랑한다. 소장품 전체 174점 중 136점이 중국 그림이다. 조선 화가로는 안견의 작품이 유일했는데, 무려 30점이나 갖고 있어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에 대한 애정을 짐작케 했다. 그러했기에 의문의 여지없이 안평대군을 조선초기 최대의 컬렉터라 이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수많은 수장품은 그의 삶의 비극적이었던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몽유도원도 한 점뿐이다.
이런 불운의 종친 컬렉터로서 안평대군과 비길 만한 이가 있으니, 바로 월산대군이다. 역시나 서른 중반에 삶을 마친 데다 동생에게 왕위를 내줘 서화 뒤에서 운둔하듯 살았던 그는, 안평대군에 비하면 컬렉션조차 소박했다. 안평대군이 ‘찬란한 비극’이었다면 월산대군은 ‘처연한 비극’이라 이를 만하다.
성종 역시 컬렉터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궁궐 수장고에는 진귀한 글씨와 그림이 가득했지만, 서화는 조선의 왕에게 가깝고도 먼 존재였다. 완물상지玩物喪志. 『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귀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에 마음이 쏠리면 자신의 뜻을 잃는다’는 의미다. 신권사회이자 유교사회였던 조선은 왕이 예술에 탐닉해 정사를 소홀히 할까 경계했다. 신료들이 성종에게 들이댄 칼날도 ‘완물상지’였다. 성종뿐 아니라 인조는 대궐 안에 도화서 교수 이징李澄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했다가 ‘호란의 치욕을 잊었느냐’는 호된 비판을 들었고, 명종은 평양의 명승지를 병풍으로 그려 올리라고 지시한 후 좌불안석해야만 했다. 왕이 무익한 것에 마음을 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두려워서였다. 성종의 예술적 기질도 대신들의 경계 대상이었다. 끊임없는 간언이 올라왔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종이 그림을 너무 그려 염려스럽다는 신하들의 글이 성종 6년부터 24년까지 계속 나온다.
이런 분위기였건만 성종은 「빈풍도」 「무일도無逸圖」 등을 즐겨 보았다. 특히 그림을 통해서 군왕의 도리를 새기고 백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성종에겐 수장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 후원가로서의 공도 있었는데, 일례로 당시 인물화에 뛰어났던 최경이란 화가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상관의 자리에까지 올려놓는다. 이런 성종의 미술 애호는 아들 연산군에게 전수되었다.
이 책에서는 ?군 이미지로 점철된 연산군에 대해 컬렉터로서의 면모라는 조금 다른 측면을 환기시킨다. 정치와 글을 멀리하고 주지육림에 빠졌건만, 그 퇴폐와 일탈 끝에 연산군의 미술 사랑이 똬리를 틀고 있는 까닭에서다. 물론 연산군은 그답게 서화를 보면서 공자 왈 맹자 왈 교훈 따위는 찾지 않았다. 여색을 탐하는 본능에 한껏 충실했다. 그가 주문한 그림엔 그런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가령 기생 그림(동산휴기도와 같은 것)을 즐겨 보았다. “그림에는 그리기 쉽고 어려운 게 있는데, 기생을 데리고 동산에 가는 것 같은 그림이 제일 그리기 어렵다고 하더라”라고 말하면서 연산군은 “화원들이 그린 것을 평가해서 직위에 반영하게 하라”고 했다. 즉 기생 그림을 잘 그리는 이를 승진시켜줬던 것이다.
그런데 궁중 미술의 발전 측면에서 보면 연산군의 공을 인정할 부분이 있다. 그가 파격적 스타일의 서화를 즐김으로써 제도적 벽을 제거해줬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 왕은 화원들에게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명할 수 없었다. 도화서는 예조 관할이었고 또 궁궐 밖에 있었다. 이는 같은 시기 명·청대의 황제들이 대궐 안 가까이에 궁중화원을 두고 화원들을 사적으로 부렸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연산군은 자신을 구속하는 이런 밧줄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림을 보고 싶었던 그는 왕 직속 화원기구로 ‘내화청’을 만들어 궁궐 안에 설치했다. 그리고 유학의 이념을 들먹이는 신하들이 눈치를 볼 것 없이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게 했다. 특히 연산군은 16세기 이후 궁중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컬렉션 열기와 서화 애호 문화의 서막을 열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후기로 가면 정조의 그림 애호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는 왜 해학적인가?’를 정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숙종, 선조, 성종이 단순히 그림을 좋아했다면 정조는 화단을 주도하면서 시정의 미술 문화까지 좌지우지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그는 화단을 장악할 ‘제도적 칼’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화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던 속박을 풀고 1784년 자비대령화원 직제를 설치했다. 할아버지 영조 때 임시로 만든 이 조직을 10배로 늘려 왕정 핵심기구인 규장각 산하의 정식 직제로 둔 것이다. 자비대령화원은 당대 예술을 주도하는 정조의 ‘미술 친위대’였다. 김홍도, 이인문, 이명기, 신한평, 김응환, 김덕성, 김득신 등이 그 소속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자비대령화원을 뽑는 시험 출제와 채점을 직접 담당하고, 그림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비판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특히 속화(풍속화)와 책거리 같은 문방 그림을 정식 시험과목으로 채택해 “모두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리도록 하라”라는 시험문제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세간의 무조건적인 중국제 선호 사상을 질타할 정도로 문화적 자긍심이 넘치는 왕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시체詩體나 필획이 억지로 중국 사람들의 흉내를 내는가 하면 문방구나 복식 등 물품까지도 나라 안에서 생산되는 것을 쓰기를 부끄럽게 여긴다. 벼슬아치의 자제들이 모두 그리로 쏠려 붙좇고 있으니, 이것은 통절히 억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헌종을 빼놓을 수 없다. 아주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가 소장했던 작품 목록은 『승화루서목』으로 전해진다. 거기엔 수장 목록 4555점이 기록돼 있는데, 서화만 900점 안팎이다. 더욱이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궁중 수장 목록 가운데 『승화루서목』만큼 서화를 체계적으로 분류한 기록도 없다. 조선시대에 서화를 보관하는 별도의 수장처가 없다가 헌종대에 이르러서야 오롯이 서화만 수장한 전문 전각이 등장했다. 그런 헌종은 예술후원가로서의 면모도 갖춰, 추사 김정희의 애제자였던 화가 허련과의 정이 애틋했다. 허련을 궁궐로 부르고 싶어 활도 쏠 줄 모르는 허련을 무과로 급제시킨 이가 헌종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는 너무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만약 헌종이 조금만 더 긴 수명을 누렸다면 조선말기 미술문화는 다시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그림 수집으로 거지가 된 양반 vs 컬렉터 문화를 호되게 꾸짖은 연암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이 미술 애호가인 점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열하일기』를 다시 읽어보면 북경 천주당에 가서 남긴 성화 감상기나 여행 중 만난 청나라 사람이 조선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내밀고 연암에게 제목과 화가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단박에 일러주는 모습에서 연암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림에 남긴 7편의 제발도 그의 서화 완상 취미를 입증한다. 연암은 서화 애호가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즉 ‘수장가’와 ‘감상가’이다. “감상할 줄은 모르고 단지 수장만 하는 자는 부유하지만 그 귀만 믿는 자이고, 감상은 잘하되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하지만 그 안목을 저버리지 않는 자이다”라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 당시 조선 사회에 수장가는 있으나 그 깊쳀가 깊지 못하다면서 부박한 컬렉션 문화를 개탄하기까지 했다. 당대 최고의 컬렉터 김광수도 연암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씨는 감상에 뛰어났다. 고동과 서화에 아주 잘된 작품을 만나면 문득 가산을 기울이고, 농토와 집을 팔아서 그것을 계속 샀다. 그래서 나라 안의 보배로운 물건들은 다 김씨에게도 돌아갔으나 집은 나날이 더욱 가난해졌다. 늙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눈이 어두워졌다. 평생 눈으로 보았던 것이 이제 입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판 가격은 10분의 2, 3을 넘지 못했고, 이가 이미 빠져서 이른바 입에 이바지하는 것이 모두 즙과 가루일 뿐이었다. 애석한 일이다. 애석한 일이다.”
연암은 “글씨는 어찌 반드시 종요, 왕희지, 안진경, 유공권의 글씨라야 하며, 그림은 하필 고개지, 육탐미, 염입본, 오도현의 그림이라야 하며, 정이는 하필 선덕 오금의 정이라야만 할 것인가. 그 진품을 구하기 때문에 온갖 가짜가 나와서 진품에 가까울수록 더욱 가짜다”라며 자기 분수에 맞는 서화 모으기를 할 것을 강조했던 수집가였다.
그런데 연암으로부터 호되게 비판받았던 상고당 김광수, 그 역시 양반 컬렉터 중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김광수는 18세기 후반 고동서화 수집 열기의 아이콘이었다. 오죽 골동품에 빠졌으면 옛것을 숭상한다는 의미인 상고당을 호로 지었을까. 서울에 세거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그는 일단 그림을 사 모을 수 있는 재력을 갖추고 태어난 행운의 사나이였다. 그런 그는 만 30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화려한 것이 싫다”며 대과를 포기했다. 이후 김광수는 ‘이것저것 구애되는 것 다 버리고 괴벽한 취미에 골몰해’ 살았다. 책상 위에 명품 벼루, 먹, 붓 등을 갖춰놓고 어루만지는 게 삶의 낙이었다. 문제는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다. 컬렉션이 불어날수록 가산은 줄었고, 집안이 빈궁해지자 하인들은 떠나 거지 신세가 되었다. 이런 김광수에 대해 연암은 감식안을 낮추보았지만, 그러나 서화에 대해 논할 때 그는 ‘고금을 평론하고 질정하느라 혀끝에서 연신 샘이 솟아날’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해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수는 김광수의 취향을 두고 ‘너무 중국(명나라)으로 기우는 것 아니냐’며 은근히 비꼬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김광수의 답이 당당하다. “저는 우리나라 풍습이 좁아터진 것이 싫고, 우리나라 문장이 번잡스럽고 진부한 것이 싫고, 우리나라 학문이 거칠고 얄팍한 것이 싫습니다. 옛것으로 돌아가려 생각하는데, 삼대는 증명하기에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고, 한위는 증명할 수 있으나 너무 소략하고, 당나라는 한위보다 상세하고 송나라는 당나라보다도 상세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제가 구비할 수가 없습니다. 무릇 명나라는 그 세대가 가깝고, 서적도 갖추어져 있으니 제가 숭상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김광수를 이해해주었던 벗이 글씨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이다. 고금을 두루 아는 해박함과 날카로운 감식안, 운치를 아는 세련됨, 유불도의 삼교에 대한 깊은 식견을 높이 샀다. “김광수가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험담으로부터 높이 벗어난 우주인이라면 나는 기껏 졸법만을 고수하는 얼빠진 유학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출 정도였다.
조선의 양반 컬렉터 중 김광수에 비견할 만한 인물로 육교 이조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과히 조선 최대의 서화수장가였다. 18~19세기 고동서화 완상 취미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 일대기가 이유원의 문집 『임하필기』에 ‘육교당벽六橋唐癖’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다. 그의 수집열은 일례로 공민왕이 사용했다던 거문고를 왕이 소유했다는 이유로 두말 않고 비싼 값에 사들인 것이나(현재 근역성보미술관 소장), 심지어 왕희지 때의 것이란 얘길 듣고 죽은 파리도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데서 알 수 있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그는 평생 벼슬을 한번 안 하고 그림에 빠져 살았는데, 스스로를 ‘그림 속에서 늙은 사람’이라 표현했다. 이런 이조묵에 대해 오세창은 ‘조선의 으뜸’이라 칭했다. 육교 이조묵의 그림 수장은 원나라 말기 왕몽에서 명나라 구영에 이르기까지, 중국 회화사의 대가 그림을 망라해 당대 최고의 컬렉터였음을 알려준다. 말년엔 그림을 사 모으다 끼니도 잇지 못할 만큼 ‘거지 신세’가 됐지만, 서화골동 애호에 대한 그의 여유는 끝내 지켜졌다.
이렇게 커다란 부를 타고난 인물들 말고, 그림과 글씨로써 교유한 가운데 수장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도 있으니, 겸재 정선의 친구인 시인 사천 이병연을 들 수 있다. 둘의 관계는 당대에도 화젯거리였다. 그런데 이병연은 겸재를 친구로 둔 덕에 당대 유명한 컬렉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일단 '경교명승첩' '영남첩' 등 정선의 그림을 그가 상당수 보유했을뿐더러 중국 유명 화가의 그림도 사 모았는데, 명말청초의 맹영광의 그림, 명나라 구영, 남송 마원, 원나라 조맹부와 전선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병연은 유명한 컬렉터였지만 감식안이 별로 없었다는 게 당대의 중론이었다. 친구 남유용은 “사천은 그림을 모르지만 좋은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며 “그림을 볼 줄 몰라서 그림을 수집할 때 항상 정선에게 물어보고 정선이 좋다고 하면 그제야 수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쨌든 조선후기 그림이 단순 감상용이 아닌 투자 대상으로 부상하던 시기 친구 정선 덕에 투자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던 그다. 신도복이란 이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이병연의 집에 진귀한 중국책이 숱하게 쌓여 있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을 묻자 북경 가는 사신에게 정선의 그림을 넘겨 자신이 볼만한 책과 바꿔오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생지기 친구와 우정을 나누면서 동시에 친구의 그림을 통해 투자 감각 있는 컬렉터라는 이름을 얻었던 그다.
양반보다 뛰어난 감식안으로 조선후기를 뒤흔든 중인 컬렉터들
조선중기까지 서화에 대한 취미는 왕이나 종친, 혹은 양반이나 누릴 수 있는 고급한 것이었다. 감히 중인 따위가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그러나 18세기 무렵 세상은 달라진다.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부를 거머쥔 중인 계층이 새로운 향유층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런 대표적 인물로 우선 석농 김광국이 있다. 영·정조 시대를 살았던 그의 직업은 의관이었다. 의관은 중국 사행을 가면 사적으로 약재 무역을 해 엄청나게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김광구 역시 그런 재력을 배경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컬렉터가 되었다.
김광국의 컬렉션은 그 목록만 봐도 입이 벌어질 정도다. 그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들이 국제적 컬렉션을 자랑했다지만, 전부 중국 일변도였다. 그러나 김광국의 수장품은 서양화, 일본화까지 망라했고, 조선의 것은 안견, 강희안, 이정 등에서부터 정선, 조영석, 이광사, 심사정, 김응환, 최북, 김명국, 강세황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었다. 화제畵題도 산수화뿐 아니라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 영모화 등 다양하다. 중국화로는 조맹부, 정룡, 여기, 탁점 등의 그림이 현재 전하고, 17세기 네덜란드 판화가 솅크의 동판화 「술타니에 풍경」과 일본 에도시대의 채색 판화 ‘우키요에’까지 갖췄다.
더욱 기릴 만한 것은 김광국은 자신이 모은 서화를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는 화첩으로 만들어 그림마다 짧은 평문을 곁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인물은 김광국이 유일했다. “(그림을)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진정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소장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그저 모으는 사람과는 다르다”라는 저 유명한 문구는 바로 정조 때의 대문자악 유한준이 석농화원에 써준 발문이었다.
유한준은 그림 감상자를 네 부류로 나눴다. 즉 아는 사람知之者, 사랑하는 사람愛之者, 보는 사람看之者, 수집하는 사람畜之者이 그것이다. 그러곤 “김광국이야말로 진정 아는 자”라고 극찬했다. “(김광국이) 그림의 고아함과 저속함, 높고 낮음, 기이함과 바름, 죽은 것과 생생한 것을 논한 것이 마치 흑백을 나누는 것 같았다. 그림을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니 단지 수집만 한 것이 아니다”라며 김광국의 미술에 대한 식견과 감식안에 찬사를 보냈다. 석농은 1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시기별로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림을 모았다. 얼마나 많았는지 『석농화원』만 해도 네댓 첩에 달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73점만이 전해진다.
특히 김광국은 당대 최고의 감식가 공재 윤두서에게 맞설 만큼 스스로의 감식안을 자랑했다. 그가 만 26세 때 이경윤의 「송음고일도松陰高逸圖」에 대해 쓴 글을 보자. “학림(이경윤)의 그림을 당시 사람들이 명수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지금의 겸재(정선)와 현재(심사정)의 그림을 같이 보면 그 고아함과 속됨의 차이가 신선과 범인의 격차와 같다. 내가 감히 그럴듯하게 입을 놀리지만 안목을 갖춘 자는 당연히 알 것이다. 학림의 그림을 두고 혹자는 강건하고 고아하며 깨끗하다고 하였는데, 이 첩을 보면 그와 같은 필치가 있는가? 아니면 이 그림보다 더 잘 그린 것이 있는데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인가? 알 수 없다.”
여기서 혹자는 윤두서를 말한다. 윤두서는 문집을 통해 이경윤의 그림을 호평했었다. 그런데 중인 신분으로 당대 최고의 선비화가 윤두서의 감식안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그건 예술에 대한 식견 없이 그저 모으기만 한 졸부 수장가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인 출신 중에는 석농 말고도 중국에서 소금 장사를 통해 엄청난 부를 거머쥔 집안배경을 업고 비싼 고서화를 사모은 이가 있다. 바로 안기로, 그 유명한 고개지의 그림에 중국 황제와 나란히 인장을 찍은 인물이다. 그가 수장한 그림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고개지의 「여사잠도권」과 「낙신부도권」을 비롯해 「범관의설경한림도」, 연문귀의 「계산루관도」,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조맹부의 「작화추색도」…. 그런데 안기가 컬렉터로서 얻은 명성, 그것은 단순히 개인 수장가로서 황실과 어깨를 견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742년 『묵연휘관墨緣彙觀』이라는 방대한 서화수장록을 남겼다. ‘묵과 인연이 있어 많은 서화를 보았다’는 의미다. 그가 항원변이나 양청표 같은 중국의 개인 수장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서법書法’과 ‘명화名畵’로 나눈 『묵연휘관』에서 다룬 서법은 397종, 다룬 화가만 110명인데, 이걸 보면 한눈에 중국 서화사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안기는 꼼꼼했다. 화가 이름과 작품명의 단순한 기록에서 나아가 색채 구도 준법 인물이나 경물의 특징에 대해 상세하게 저술했다.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크기, 인장, 관계 기록, 제발 내용, 종이나 비단의 표면 상태까지도 살펴 수장가로서의 가장 바람직한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선후기 중인들은 양반처럼 살고 싶어 스스로를 ‘여항지사呂巷之士’ ‘소유小儒’라 부르며 신분 상승에 대한 꿈을 꿨는데, 이들은 서화수집의 세계로도 발을 성큼 들여놓았다. 벽오사 동인 가운데 컬렉터로서 눈길을 끄는 이는 두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의관을 했던 중인 시인 유최진과 경아전에서 서리로 일했던 중인 시인 라기羅岐(나기)다. 이들 중인이 주로 감상했던 그림은 중인이 그린 그림이었다. 가령 유최진이 감상하거나 수장했던 작품은 전기의 매화병, 유숙의 「노안도」와 「벽오청서도」, 이기복의 「묵란」 등 동시대에 같은 신분의 굴레를 쓰고 살았던 중인 화가들의 작품이다. 라기도 비슷했다. 문장가로서 중인 시단에서 명성을 누렸던 그 역시 유숙, 전기, 조희룡, 김석준의 그림을 소장했다.
이처럼 중인들은 중인들 그림을 좋아 했지만, 중인이면서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인물도 있으니, 그가 바로 추사의 세한도의 주인공인 역관 이상적이다. 그는 뛰어난 역관이면서 내로라하는 국제적인 서화 컬렉터였다. 역관으로서 잦은 중국 방문은 그의 컬렉션 색깔을 특징지었다. 그는 청나라를 열두 차례나 다녀온 결과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중국 인사들을 통해 서화와 책자, 금석문 등을 구입했다. 자연히 컬렉션은 청나라의 것이 많았다. 『은송당집恩誦堂集』에 따르면 그가 소장했거나 접했던 서화의 작가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왕홍, 장요손, 정경조, 대희 등 청대 서화가들이다. 이는 다른 중인들이 같은 신분끼리 시회 열고 화가를 후원하고, 금석탁본도 조선에 나도는 것만을 모았던 것과 비교하면 여타 중인과는 삶의 지향점이 달랐던 이상적의 면모를 부각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서화 수장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근대의 컬렉터 오세창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아버지 오경성의 서화 수집욕은 대단했다. 청나라를 오가며 원·명나라 이래의 고서화, 종 벼루 같은 각종 골동품, 금석문 탑본을 부지런히 구입해 한양으로 들고 들어왔다. 어찌나 많이 모았는지 가산이 기울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오세창이 묵향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망국 무렵이었다. 식민지 시대 정치사회 활동에 발이 묶이자 그는 서화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특히 3·1만세운동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에는 서화협회 활동과 저술 작업, 고증학에 입각한 작품 제작에 전념하는 한편 예술후원 활동에 전념했다. 오세창의 서화 수장활동은 일제로부터 수탈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야겠다는 보존의식의 발로였다. 당시 몽매한 국민들은 몇 푼 이익을 보고 귀한 서책이며 도자기, 옛 기물을 넘겨버리던 시절이었다. 그의 ‘애국적 서화수집활동’은 사회적인 감동을 일으켰다. 10만 석 거부의 상속자인 전형필이 골동서화를 수집하며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이나, 오봉빈이 서화 전시와 판매를 목적으로 근대적 화랑인 조선미술관을 세운 것도 오세창의 권고와 지도 덕분이다.
이 책은 이들 서화수장가들 이야기 외에 조선시대에도 판쳤던 가짜 그림 논쟁, 조선시대 그림값에 대한 정보, 또 그림 감상을 할 때 빼놓지 말고 봐야 할 제발, 인장 등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