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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
2. 딸기빹
3. 그가 모르는 장소
4. 작별 인사
5. 어떤 여자
6. 그는 언제 오는가
7. 해설 : 존재의 괴리, 그 슬픈 아름다움 - 김병익
8. 작가의 말

저자 소개1

신경숙

Shin Kyung-Sook,申京淑

인간 내면을 향한 깊은 시선, 상징과 은유가 다채롭게 박혀 빛을 발하는 문체,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통해 평단과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한국의 대표 작가다. 1963년 1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야 겨우 전기가 들어올 정도의 시골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근처에서 전기회사에 다니며 서른 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사는 '닭장집'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누이와 함께 한 방에서 살았다. 공장에 다니며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다 최홍이 선생님을 만나 문학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컨베이어벨트
인간 내면을 향한 깊은 시선, 상징과 은유가 다채롭게 박혀 빛을 발하는 문체, 정교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통해 평단과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한국의 대표 작가다. 1963년 1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야 겨우 전기가 들어올 정도의 시골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근처에서 전기회사에 다니며 서른 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사는 '닭장집'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누이와 함께 한 방에서 살았다. 공장에 다니며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니다 최홍이 선생님을 만나 문학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컨베이어벨트 아래 소설을 펼쳐 놓고 보면서, 좋아하는 작품들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모조리 베껴 쓰는 것이 그 수업 방식이었다. 그 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1985년 『문예중앙』에 중편소설 「겨울우화」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였다.

스물두 살에 등단하였을 때는 그리 주목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1988년 『문예중앙』신인상에 당선된 뒤 창작집 『겨울우화』를 내었고,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구성작가로 일하기도 하다가 1993년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강물이 될 때까지』,『풍금이 있던 자리』,『오래 전 집을 떠날 때』,『딸기밭』, 장편소설 『깊은 슬픔』,『외딴방』,『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자, 혹은 다가설 수 없는 것들에 다가서고자 하는 소망"을 더듬더듬 겨우 말해 나가는 특유의 문체로 슬프고도 아름답게 형상화하여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신경숙의 첫 장편소설 『깊은 슬픔』은 한 여자와,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 여자 '은서', 그리고 '완'과 '세'라는 두 남자를 소설의 표면에 떠올려놓고 있다. 그들 세 사람을 맺어주고 환희에 빠뜨리며 절망케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올이 얽히고 풀림에 따라, 고향 '이슬어지'에서 함께 자라난 세 사람의 운명은 서로 겹치고 어긋난다. 그러나 『깊은 슬픔』이 정밀하게, 더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실린 시선으로, 그리하여 진하고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그려 보이는 것은, 그들의 사랑과 운명이 화해롭게 겹치는 국면이라기보다, 자꾸만 어긋나면서 서로의 기대와 희망을 배반하는 광경이다. 아니, 차라리 그들의 관계에선 겹침이 곧 어긋남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행했던 과거를 너무 쉽게 잊는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어제가 있어서 오늘이 있고 내일이 존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한 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려웠던 그 시절을 되짚어 보게함으로써 현재를 돌아보는 자성(自肖)의 기회를 만들어준다. 또한 이 작품은 작가의 자폐적 기질,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 삶의 속절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요히 수납하는 태도 등이 어디서 발원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내성의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신경숙 문학의 정점이자 제목 그대로 외딴방에서 외롭게 죽어간 한 가여운 넋에 대한 진혼가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신경숙은 자신의 체험을 질료로 한 글쓰기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보여준다.『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 불륜의 관계에 있는 여자가 그 남자와 새로운 삶을 꾸리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되짚어준다. 특히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의 새 여자와 어머니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삶에 찌들어 꾸밈이란 없이 소박하게 가정을 꾸려 나갔던 이 땅을 일구어낸 「어머니」와,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 땅의 「여성」과의 사이, 그 사이를 보여준다. 그 사이 속에는 무시 할 수 없는 사회 통념이 들어가 있다. 「어머니」를 긍정해야하면서 동시에 부정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이중적 잣대는 있지도 않는 풍금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고 제 3의 새 여자, 또 다른 화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 한다.

2007년 겨울부터 2008년 여름까지 「창작과비평」에 연재되어 뜨거운 호응을 얻은 『엄마를 부탁해』는 섬세하고 깊은 성찰, 따뜻한 시선의 작가의 절정의 기량으로 풀어낸 엄마 이야기이자 엄마를 통해서 생각하는 가족 이야기이다. 늘 곁에서 보살펴주고 무한정한 사랑을 주기만 하던,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엄마가 어느날 실종됨으로써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가족들 각자가 간직한, 그러나 서로가 잘 모르거나 무심코 무시했던 엄마의 인생과 가족들의 내면을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2011년 'Please Look After Mom'라는 제목의 영문판이 제작되어 출간 전부터 호평을 받고 있으며, 미국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22여 개국에 판권이 판매되었다.

일곱번째 장편소설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사랑의 기쁨과 상실의 아픔을 통과하며 세상을 향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청춘세대를 향한 신경숙 문학의 간절하고 절실한 소통의 발신음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쳀 시대와 시간을 뚫고 나가 어떻게 서로를 성장시키며 불멸의 풍경이 되는지를 여러 개의 종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듯 보여준다. 팔 년 만에 출간되는 여섯번째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은 세계로부터 단절된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풍경들을 소통시키기 위한 일곱 편의 순례기로, 익명의 인간관계 사이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특유의 예민한 시선과 마음을 집중시키는 문체로, 소외된 존재들이 마지막으로 조우하는 삶의 신비와 절망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빛들을 포착해내어 이 시대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바닥 모를 생의 불가해성을 탐색한다. 2013년에 출간한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명랑하고 상큼한 유머로, 반짝이는 스물여섯 편의 짧은 소설들을 담은 소설집으로, 산다는 것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일상의 순간들에 스며들어 그리움이 되고 사랑이 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달에게 우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짧은 형식의 글이자, 달이 듣고 함빡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엮었다.

이외의 작품으로 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 『감자 먹는 사람들』,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종소리』,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짧은 소설집 『J이야기』,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내 슬픔아』,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09쪽 | 445g | 148*210*30mm
ISBN13
9788932011523

책 속으로

지금 나는 내 삶을 잊어가는 중이다. 이미 나의 내부에서 망각이 진행되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오늘, 강의실에 들어가서는...그 막을 길 없던 연상작용 그리고 상상력들이 갑자기 그의 이름과 함께 기억나지 않았다. 수천 번도 수만 번도 더 되뇌었을 그의 이름이.

--- p.37

저는 한동안 유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는 가능한 한 빨리 유에 관한 것을 잊어버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유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전하지도 않았고 유와 관련된 것과는 등을 돌리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유를 상실한 슬픔은 어떤 식으로도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될수 있는대로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유를 복원하려 합니다. 유에 관한 흔적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슬픔을 통과해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저의 상황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 p.55

'연신 산에....라고 대답하던 남편은 울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를 잃고도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남편. 오히려 모든 일상을 더 단정히 잘 꾸려나가던 남편이 단추가 두개나 풀린 구겨진 잠옷을 입고 비틀며 울고 있었어요. 혼자서 죽은 딸아이를 산에 묻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승진 시험을 보고 헤드헌터를 통해 연봉이 더 많은 곳으로 회사를 옮기던 남자가 종내엔 제 품에 와락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울었어요.'

--- p.

아침에 집을 나올때면 그 남자의 어머니는 그 남자에게 도시락을 싸준다. 돈 이 천원과 함께. 그 남자는 어디에 있거나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들고 처녀의 학교 앞으로 온다. 그들은 만나서 데모대열을 헤치고 분식ㅈ비을 찾아가서 삶은 ㄹ면 하나를 시켜 가운데에 놓고 그의 도시락을 나눠먹는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의 잡곡이란 잡곡은 모르는게 없는 듯하다. 수수와 조, 검정콩과 보리. 제각기 다른 맛의 잡곡으로 섞어 ㅈ어진 밥은 오래 씹으면 결국 단맛 하나로 결합된다. 밥을 오래 씹는 것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남자가 일을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분, 혹은 십분, 시간을 연장해보려는 처녀의 수작은 그 남자의 직업과 연관된 약속, 배달, 방문 들에 착오가 생기게 한다. 그것과의 비례로 사람이나 사물에 고정되지 못한 채 흔들리던 그의 불안정한 시선은 안정을 찾고 있다.

--- p.64

아름다운 호수다. 옛날에 향어가 살았고 이제는 누치, 붕어, 모래무지가 살고 있는 호수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호수다. 어쩌면 그의 카메라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필름 속에서나 존재하는 호수다.

--- p.143 (그가 모르는 장소 중에)

산에. 그래서였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산에만 가면 눈 내리는 산에만 가면 외려 따뜻하고 마음이 평온했던 것일까요. 무엇인가가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딸아이였을까요? 그애가 그렇게 항상 제 곁에 따라다녔던 것일까요. 부엌창으로 들어온 눈빛에 비친 남편의 얼굴을 바로 보았습니다. 연신 산에....라고 대답하던 남편은 울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를 읽고도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남편. 오히려 모든 일상을 더 단정히 잘 꾸려나가던 남편이 단추가 두개나 풀린 구겨진 잠옷을 입고 입을 비틀며 울고 있었어요.혼자서 죽은 딸아이를 산에 묻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승진 시험을 보고 헤드헌터를 통해 연봉이 더 많ㅇ느 곳으로 회사를 옮기던 남자가 종내엔 제 품에 와락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울었어요.

--- pp.31-32

사랑이 다시 오면 이제는 그렇게 휘둘리지 않고 놀라지 않고 아프지 말아야지. 외로웠지만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도. 사랑은 허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작별 인사 중, p.148)

자신의 꿈은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일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상처도 함께하고 슬픔도 함께하는 것이라고. 사랑이 늦게 온 것이 죄라고 하더군요. 나를 만나기 전에, 승희를 낳기 전에 만났으면 좋을 사람을 이제서야 만난 거라구요. 그 사람하고는 무슨 일이든 함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장소는 그 사람이라고...... (그가 모르는 장소 중, p.136)

존재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죽음을 다른 존재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어쩌면 단 한 사람에게만. (그는 언제 오는가 중, p.230)

--- p.

부모님이 사고를 당했던 자리에 가보았다. 다녀오는 데 하루가 다 걸렸다. 옛날엔 상당히 높은 다리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뛰어 내려도 괜찮을 것 같은 낮은 다리로 느껴졌다. 마을엔 들어가지 않았다.

--- p.270

무엇을 잊는다는 것은 대상을 심연에 밀어놓고 문을 닫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끊긴 우편환과 함께 지워진 존재, 나의 아버지. 내 생의 출입구에 부재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놓고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의 존재가 그 삼월의 교정, 그 남자가 신고 있는 흰 고무신에 의해 닫힌 문을 열고 이끌려 나오는 것을 가슴 쓰라리게 바라봤을 때는....

--- p.44

무서운 아버지를 통해 달아나는곳이 바다였는디, 야야, 언젠가 해가 질때의 바다에 한번 나가봐라. 미칠것만 같어야. 해의 각도에 따라서 시시각각 은색으로 청회색으로 바다색이 달라지고 갈라지는디, 마음을 환장하게 혀야. 난 그런 바다를 두고 집을 버리고 와버렸다. 견딜 수가 없었어야. 무엇이오? 무엇이 그렇게 견딜 수가 없으셨어요? 무엇이랄 게 있느냐...다아 그랬다. 다아...젊었으니까..젊어서 안그랬냐...

--- 2002/08/09 (romi0311)

'당신은 나와 이혼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이혼한 상태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두려운 거예요. 이혼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들도 두렵고 이혼이라는 딱지가 당신 사회생활에 끼칠 영향도,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두렵고,..... 우린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그것을 인정해요, 당신은 내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날마다 괴로울 거고 우리는 서로 지옥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 pp. 133-134

눈을 떴다. 먼데서 나를 데리러 오는 자의 기척이 느껴진다. 나의 몰골을 이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가족도 친척도 서울의 내 옛친구들이나 칠레의 로베르토조차도. 오늘은 화요일. 내 옛친구들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Y와 T와 A와 J. 그리고 기선생. 우리는 오늘 T네 12층 아파트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지.

T네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물 위에서 아직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다.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내가 물 위에 구름처럼 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광활한 잿빛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달비가 내 얼굴에 내리칠 때마다 구멍이 파이는 듯 쓰라리고 아팠다.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을, 아직도 어디로 떠내려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 몸뚱이에서 빠져나와 공중으로 떠올라서였다.

내가 빠져나온 내 부서진 육체를 일분 이상 더 바라볼 수가 없어. 어머니, 당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 계곡이 그렇게 많은 물을 토해낼 줄 누가 알았을까. 야영 텐트를 친 곳에서 40킬로나 떨어진 사천만 바다에서 떠내려와 있다니. 내 모자는 어디로 갔을까? 내 텐트는? 배낭은? 서울에서 하행선 열차를 타면서 나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는데. 텐트와 배낭이며 버너며 코펠이며 물통까지 Y네 것인데. 계곡에 도착한 건 그저께 일이었지. 칠레로 가지 않고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

토끼 모양의 이 반도 남쪽 지리산 계곡에 온 것은 여태까지의 많은 일을 잊어버리고, 가장 잊지 못할 것을 장난처럼 여기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기약하면서 살아가려는 내 마음을 자축하려던 것이었다. 사랑이 다시 오면 이제는 그렇게 휘둘리지 않고 놀라지 않고 아프지 말아야지.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는 일이란 걸 인정해야지. 외로웠지만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도. 사랑은 허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틈에 물은 나를 덮치더니 내 사지를 휘감아 사납게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피해볼 도리가 없었다.

쿠르릉, 일 분 만에 야영장은 물바다가 되었으니까. 옆 텐트에서 잠깐 텐트 주위의 고랑을 살피던 남자가 후닥닥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든 딸애를 안고 뛰어나오는 것을 본 것도 같고, 피해라! 피해라! 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계곡 상류의 둑이 터진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순식간에 어떻게 그리 많은 물이? 더구나 야영장에 그 거대한 물줄기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물살에 휩쓸리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잡고 버티는 사람, 바위 위에서 미끄러지는 사람, 벌써 저만큼 떠내려간 어린애들. 어두운 골짝으로 퍼붓는 비 사이로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순간순간 밝아지는 번갯빛 사이로 서로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떠내려가는 사람이 보였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소리도 들렸다. 얼이 빠진 채로 물보라에 뒤섞이며 나는 부딪치고 찢기고 패었다. 계곡의 폭은 대체로 깊고 좁았지만 때로 100미터 폭으로 넓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30미터도 안 되는 좁은 폭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보면 짙푸른 산 속에 누워 꿈틀거리는 뱀의 형상이었다. 그 계곡길을 40킬로나 물보라에 휩싸여 여기까지 떠내려온 모양이다. 아름다웠던 계곡의 바위는 곧 흉기로 변했다.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살점이 툭툭 떨어져나갔다. 나는 뿌리뽑힌 나무들에 얻어맞고 폭포의 거센 물살에 내팽개쳐졌다. 아직은 먼 곳이다. 저 검은 배가 나에게 닿기 전에 나는 T네 집에 가야 한다.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나는 상처투성이 내 몸을 두고 사천만을 날아올랐다.

--- p.147-149

나를 잊지 말아줘. 이따금 숨은 그림을 찾듯이 생각해다오...살아서 행복한 날이면 한 번만 나를 생각해줘. 봄바람이 살랑일 때, 과일에 단물이 들 때, 단풍이 질 때, 첫눈이 내릴 때에 한 번만...

--- p.202

“딸기밭에서 돌아온 후 나는 금지된 것들 근처에는 가지 않는다. 생의 불가능성을 받아 들인다. 내가 분석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누군가의 인생 속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그것이 인간을 변화시키리란 것도. 내 인생에 그 남자와 유를 통과시킴으로서 나의 욕망은 끝에 다다랐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망각의 일만 남아 있을 뿐 그 옛날 금지된 것을 향해 치닫던 처녀가 나였는지 희미할 뿐.

--- p.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속의 등장인물 들이 거의 표정이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울 것 같은데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경직되거나 무표정이었죠. 그런 표정 없는 사람들 속에 소녀는 신비하게 혹은 수수께끼 속의 인물처럼 서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는데도 보일 듯 말 듯한 ‘흰옷을 입은 소녀’를 바라보며 그날 저는 많이 울었어요.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언니 집에서 떠나올 때 쇠라의 화집을 들고 왔지요. 막상 가지고 나왔으나 다시는 펼쳐보지 않았던 화집을 그날 밤에 저는 다시 펼쳤어요. 방안을 밝혀주는 눈빛에 의지해 화집을 한장 한장 넘겨 ‘흰옷을 입은 소녀’ 를 찾아갔습니다.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소녀가 목이 메일 만큼 그리웠어요. 눈보라 치는 밤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흰옷을 입은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흰빛에 싸여 있었어요.

--- p.

~사랑이 다시오면 이제는 그렇게 휘둘리지 않고 놀라지 않고 아프지 말아야지.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는 일이란 걸 인정해야지 외로웠지만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도, 사랑은 허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틈에 물은 나를 덮치더니 내 사지를 휘감아 사납게 아래로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나는 사라지지만 너희는 나를 기억해줘. 그 말을 하러 왔지. 살아서 행복한 날이면 한 번만 나를 생각해줘. 봄바람이 살랑일 때, 과일에 단물이 들 때, 단풍이 질 때, 첫눈이 내릴 때에 한번만 M이라는 여자가 있었다고... 세시간짜리 산책을 했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고. 심야에 긴 전화통화도 했었다고, 가끔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고... M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p.148 ---p.206

“딸기밭에서 돌아온 후 나는 금지된 것들 근처에는 가지 않는다. 생의 불가능성을 받아 들인다. 내가 분석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누군가의 인생 속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그것이 인간을 변화시키리란 것도. 내 인생에 그 남자와 유를 통과시킴으로서 나의 욕망은 끝에 다다랐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망각의 일만 남아 있을 뿐 그 옛날 금지된 것을 향해 치닫던 처녀가 나였는지 희미할 뿐.

--- p.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속의 등장인물 들이 거의 표정이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울 것 같은데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경직되거나 무표정이었죠. 그런 표정 없는 사람들 속에 소녀는 신비하게 혹은 수수께끼 속의 인물처럼 서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는데도 보일 듯 말 듯한 ‘흰옷을 입은 소녀’를 바라보며 그날 저는 많이 울었어요.
쉴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언니 집에서 떠나올 때 쇠라의 화집을 들고 왔지요. 막상 가지고 나왔으나 다시는 펼쳐보지 않았던 화집을 그날 밤에 저는 다시 펼쳤어요. 방안을 밝혀주는 눈빛에 의지해 화집을 한장 한장 넘겨 ‘흰옷을 입은 소녀’ 를 찾아갔습니다.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소녀가 목이 메일 만큼 그리웠어요. 눈보라 치는 밤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흰옷을 입은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흰빛에 싸여 있었어요.

--- p.

~사랑이 다시오면 이제는 그렇게 휘둘리지 않고 놀라지 않고 아프지 말아야지.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는 일이란 걸 인정해야지 외로웠지만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도, 사랑은 허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틈에 물은 나를 덮치더니 내 사지를 휘감아 사납게 아래로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나는 사라지지만 너희는 나를 기억해줘. 그 말을 하러 왔지. 살아서 행복한 날이면 한 번만 나를 생각해줘. 봄바람이 살랑일 때, 과일에 단물이 들 때, 단풍이 질 때, 첫눈이 내릴 때에 한번만 M이라는 여자가 있었다고... 세시간짜리 산책을 했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고. 심야에 긴 전화통화도 했었다고, 가끔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고... M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p.148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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