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내 머리에 맨 처음 떠오르는 이름은 ‘아버지’이다. 무겁고도 힘겨운 이름, 아버지.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족이라는 짐을 짊어진 외롭고 고독한 지게꾼이 바로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세상의 모든 남자다. 나의 아버지는 가족만이 아니라 농사일까지 짊어진 진짜 지게꾼이었다. 넓은 세상 구경 한 번 제대로 못하시고, 평생 고향땅만 지키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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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를 보면,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다산의 개인 모임이 있는데, 그 일원인 한치응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정치하는 사람은 변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토끼 가죽을 썼다가 곰 가죽도 쓰고, 때에 따라서는 호랑이 가죽도 쓸 수 있는 임기응변이 필요하지요.”그러나 다산의 의견은 달랐다. “정치란 성실과 정직이 제일 중요하지요. 권모술수는 그 자체가 권모술수일 뿐입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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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의 스타 혜리가 한 인터뷰에서 “고난도 자산이다”라는 말을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련은 분명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공도 쌓이게 했다. 어쩌면 내가 이루어낸 작은 성공들은 모두 시련의 세월이 가져다준 내공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억울한 피해가 나를 아프게 한다. 나로 인해 고통 받았을 가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p.102
정조는 규장각을 통하여 수많은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으며, 새로운 인재 등용이란 명분으로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를 과감하게 기용한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 대표 인물이다. 당시 서얼 출신 기용에 대한 노론벽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 임금은 용단을 내린다. 정조는 규장각이란 싱크탱크 기관을 만들었고, 규장각에 세부과제(T/F)를 부여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생활을 살핀 것이다.
--- p. 112-113
새벽부터 아파트 주차장에서 무작정 대기하다가 아파트 입구를 나오는 순간 달려가 인사를 하고 준비된 자료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승용차에 승차할 때까지 따라가면서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설명시간은 불과 5초~10초 정도로 번갯불에 콩 볶는 식이었다. 설명이 제대로 전달될 리 없겠지만, 적어도 나의 간절한 정성만은 전달될 것이라 믿었다. 당시 나는 보름 가까이 서울에 상주하면서 새벽부터 남의 동네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남의 동네 아파트 입구에 차를 대고 대기하다 보면 어떤 날은 경비원이 달려와 여기서 뭐하냐며 따질 때도 있었고, 어떤 경우는 그냥 쫓겨나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도둑놈 취급까지 받기도 했다.
--- p.140
“시장님, 저는 문경새재 입구에서 70 평생을 농사짓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억울합니다. 10년 전 상초리에 살다가 KBS왕건 드라마 세트장(지금은 [대왕 세종] 세트장이 들어서 있다)이 들어서면서 강제 철거 되었지요. 그때 저는 아무 불평도 않고 협조했습니다.
그때 시청에서 지금 제가 사는 하초리 부지로 이사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0년 만에 이번에는 주차장 부지 조성한다고 또 이사 가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저하고 무슨 원수진 일 있습니까. 왜 저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겁니까. 제가 뭐를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힘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이제 더 이상 이사 못갑니다.”
--- p.175
환경 측면에서 영남권 신공항 건설의 본질은 국토 균형 발전에 있다. 수도권만 개발할 것이 아니라, 영남권과 호남권도 함께 개발하자는 거다. 국토 균형 발전만이 지속가능한 개발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안은 서울을 축소하는 일뿐이다. 서울을 축소해야 부산이 살고, 대구가 살고, 광주가 산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서울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