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이른 봄, 우리는 이곳에 집을 짓기로 했다. 남편과 내가 사는 지역은 무화과, 고구마가 많이 나고 인구가 적기로도 유명하다.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스무 가구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올라치면 걸어서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이른바 깡촌이지만 그래도 인터넷과 택배 서비스는 닿으니 ‘자연인’과는 거리가 멀다. 인터넷 없이 하루도 못 사는 뼛속부터 도시인인 우리가 시골에 정착할 생각을 한 이유는 ‘집’이었다. 남편은 직접 집을 짓고 싶어 했고 나는 이사 다니지 않아도 되는 마당 있는 집을 원했다. 그러니까 시골은 우리의 다소 ‘엉뚱한’ 필요가 맞아떨어진 곳이었다.
---「프롤로그_시간을 벌어서 낮잠을」중에서
마담 JD는 가이드가 되어 봄나물과 함께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먹는 풀이 이렇게 많다니 이걸 다 맛보기 전에 봄이 끝나버릴 것 같아 흥분과 조바심이 교차했다.
“비탈 아래에 길쭉한 잎사귀가 쪼르르 달린 거 보이지? 그건 뿌리를 먹는 둥굴레여. 근디 그거 먹으면 머리칼이 허옇게 센다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안 먹어.”
“우와, 저게 차로 우려먹는 그 둥굴레예요? 그런데 어르신들 머리칼은 이미 하얗지 않아요?”
“그라긴 하지. 아무튼 우리는 안 먹어.”
둥굴레차를 좋아하는지라 귀가 솔깃해졌다. 앞이 막힌 보라색 고무 슬리퍼를 신은 마담 JD 뒤를 쫓으니 어느새 길도 없는 뒷산 중턱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등산화에 등산복까지 갖춰 입고 오를 법한 산인데 마담 JD는 슬리퍼 안에 들어간 흙을 이따금 탁탁 털면서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셨다. 도착한 곳은 코끼리 고사리와 검푸른 두릅이 나는 비밀 지대. 이런 고급 정보는 외지인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는데, 이제 막 마을에 들어온 새댁을 끌고 다니며 일일이 알려주셨으니 보통 특혜가 아니었다.
---「1장_공짜 좋아하세요?」중에서
베를린에서 처음 한인 마트를 갔을 때 주인아저씨는 여기서 정보도 얻고 편하게 지내려면 한인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그렇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상대 또한 한국인임을 명심하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한국을 어렵게 벗어난 사람들이 만든 또 다른 한국, 종교에 대한 믿음조차 없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나 어쩌나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혼란스럽고 아이러니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관념, 부모와 사회가 정한 옳음과 기대를 내려놓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텅 빈 몸이 되어서야 남편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워졌다. 생각해보면 독일행은 예술학교에 가고 싶은 나의 의지였기에 이곳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1년여 지내보니 어떤지, 또 2년의 어학 공부를 마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따금 남편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좋은 나라에 살아보니 잘 사는 게 뭐고 어떻게 살면 행복한지 알 것 같아. 그걸 우리나라에서 해보고 싶어.”
“그럼, 한국에 가서 벽돌집 지어줄 거야?”
남편의 진취적인 모습에 앞뒤 재지도 않고 바로 설득됐다. 독일에서 찾은 삶의 방향, 그것을 ‘혼자 집 짓기’로 시작하겠다 하니 참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너무 엉뚱해서 오히려 납득이 갔다면 누가 이해할까?
---「2장_떠나보면 알 거야, 나를」중에서
몇 살쯤에는 결혼해야 하고 언제까지는 아이 낳아야 하고 남들만큼 재산을 불리려면 당연히 아파트를 분양받아야 한다는 공식에서 완전히 이탈한 우리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그랬다. 처음에는 따로 믿는 구석이 있거나 어떤 원대한 계획이 있을 거라 추측하지만 몇 마디 나눠보고는 ‘앞으로 어쩌려고’ 하며 걱정하는 것이다. 먼 미래에 대한 구체적이고 안정적인 계획이 없던 건 사실이다. 별다른 철학이 있어서 남편 혼자 집을 짓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도시가 특별히 싫다거나 시골이 딱히 좋아서도 아니었다. 남편은 집을 지어보고 싶었고 나는 넓은 생활공간 겸 작업장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 돈으로 땅을 사고 집을 지으려니 시골이 적합했던 건데 사람들이 갸우뚱하게 바라보면 ‘우리가 잘못됐나?’ 하고 같이 갸우뚱해졌다.
도르래로 간신히 창호를 들어 올려 휑뎅그렁하던 구멍에 끼워 넣고 우레탄폼으로 빈틈없이 테두리를 마감하니 드디어 완전한 실내가 됐다. 거실 창을 닫자 경운기 진동이 끊기고 바람이 멈추는데 바깥과 분리된 아늑함이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우리를 향한 평가와 우려와 습기와 벌레로부터 잠시 해방감을 느꼈다. 아니, 필요에 따라 여닫을 수 있는 자유를 느꼈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3장_그래도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중에서
“살아온 날들 중에 요즘이 제일 좋아. 단단한 땅속에 뿌리를 깊이 박고 서 있는 기분이야.”
“전엔 어땠는데?”
“사람들이 나를 떠나갈까, 누군가로부터 버려질까, 어디론가 밀려날까 안절부절못했지. 지금은 그런 걸 붙잡기 위해 더 잘하려 애쓰거나 본심을 숨기고 억제하려는 마음이 없어.”
“단순해진 건가?”
“바깥에 시선을 둘 필요가 없어진 거지. 그 에너지를 나한테 쓰니까.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집중이 잘돼.”
“쇼핑몰이나 맛집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 맞다. 그것도 한몫하지.”
우리는 여전히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시골에 오기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그것들의 분량과 방향이다. 이제는 꼭 필요하고 원하는 곳을 정확히 겨냥해서 최소한만 이용한다. 숨김없이 거친 사람들, 다듬어지지 않은 대자연, 묵묵히 치열한 생태계, 땅과 하늘이 전부인 벌판,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 새까만 밤, 깊은 어둠 속의 별, 폭우 뒤의 청량함. 시골은 다정하고도 혹독하게 그리고 무심하면서도 강렬하게 ‘지금’을 ‘잘’ 사는 방법을 알려줬다. 시골은 우리에게 스승이었다.
---「4장_시골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