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막 싸웠을 때, 정말 눈물이 났다. 전화기를 던져서 망가지고 난리가 났다. ㅠㅠ” (M여자중학교 2학년)
위 학생의 감정을 대변하는 단어는 ‘눈물’과 ‘난리’이다. 학생의 부모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자주 싸웠던 것은 아닌 듯싶다. 반면 격렬한 부부 싸움에 대해서 아이들은 최상급의 표현을 나열, 반복하여 당시의 심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외할머니가 계시는데도 심한 부부 싸움…. 절대적 절망적 충격이었다. 그때의 일이 가끔씩 생각날 때면 우울해지고, 어른이라는 것이 죄악이고 증오스럽게 느껴진다.” (D고등학교 1학년)
“매우 심한 부부 싸움, 충격, 실망, 짜증, 답답하다. 나는 집에 가면 말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싫어진다.” (S여자중학교 1학년)
아이들은 그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듯 백지 위에 ‘절대적, 절망적, 충격, 죄악, 실망, 짜증’ 등 강한 표현을 써가며 부정적 감정을 쏟아내었다.
부부 싸움은 자녀들의 ‘안전의 욕구’를 위협한다. 아주 드물게 약한 강도로 일어나는 부부 싸움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무신경할 수도 있으나, 부부 싸움으로 인해 자신에게 불이익(저녁밥을 굶게 된다든가 하는 등)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면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처음에 부부 싸움의 강도가 약하고 간헐적일 때는 엉엉 울면서 이를 중지시키려는 노력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소용없거나 부질없다고 여겨질 때, 아이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부모의 싸움으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부모가 싸울 때마다 그에 휘말려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인 데다가,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어른만큼 오래 견딜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
부모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때, 형제와 차별 대우할 때, 생활 전반을 통제·강요할 때,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가할 때,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자녀들이 부모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지만, 설문 조사 통계로 나타난 1순위는 단연코 ‘부부 싸움’이다. 이것은 자녀를 둔 부모라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결과가 아닐 수 없다.
_01 아이가 부모에게서 멀어질 때
“아빠가 나를 가끔 때리고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거(실망) 없어요.” (S고등학교 1학년)
고 1 정도의 나이에는 부당한 폭력이나 강압적 태도에 대해 자아 독립과 자유를 향한 심리적인 저항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학생은 아빠의 폭력에 대해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고 썼다. 부모의 권력적 통제에 의해 길들여져 무력해진 경우이다.
“훌륭한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사랑을 많이 주시고, 칭찬과 웃음으로 저에게 얘기를 해주시고, 너그러움으로 저의 잘못을 이해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이러한 것들로 저는 입가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K여자고등학교 3학년)
고 3인 위 학생은 부모를 하느님처럼 찬양하고 있어서 답변의 진실성이 의심스럽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위장(faking good)한 것이 아니라면 ‘심리적 성장 지체’일 가능성이 있다. 부모를 영웅시 실망할 것이 없다는 이 학생의 진술은 반어이다. 실망이 너무 커서 부모에 대한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는 뜻이다.
부모도 불완전한 사람이므로 때로는 잘못할 수 있고 자녀에게 실망을 안길 때도 있다. 그런데 그 실망의 정도가 너무 강하여 깊은 상처를 남기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지속되는 경우라면 문제가 된다. 빈번히 발생하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자녀의 마음속에 한 겹씩 벽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점차 허물기 어려운 두툼한 장벽이 되어 부모와 자녀 사이를 가로막게 된다.
부모는 자녀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기대하고, 자녀들에게 부모 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성취하라고 요구한다. 그 가치는 대개 지위와 권력, 부와 명예 같은 파워를 향한 것이다. 파워를 가지게 되면 인간의 기본 욕구인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유리해진다. 이런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공부를 강요하며 진로 선택권을 빼앗기도 하고, 생활 태도를 시시콜콜 간섭하고 꾸짖는다. 합리적이고 절제된 꾸지람이라면 아이들이 수긍할 수 있겠지만, 짜증이나 신경질, 비난이나 훈계, 호통이나 욕설 등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은 자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은 부모에게 저항하도록 만든다. ‘절제된 꾸지람’과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은 많이 다르다. 이는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의 차이인데, 부모들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혼내는 것’은 아이의 행동에 초점을 두어 따끔한 충고나 훈계를 하는 것이고, ‘화내는 것’은 아이를 대상으로 비난하고 분노하며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아이를 혼낼 때는 부모의 정서가 의연하여 비교적 담백함을 유지할 수 있지만, 화를 낼 때는 감정적 흥분 상태가 되어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붉어지거나 떨리는 등 신체적 증상이 나타난다. 물론 처음부터 화를 내고자 하는 의도로 훈계를 시작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과정에서 아이가 말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으면 화가 솟구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화내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혼내는 방식의 훈육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_08 준비 없는 부모 노릇, 생활 통제
전교 1~2등을 다투는 한 학생이 있었다. 수업 태도는 과히 좋지 않았다. 졸고 있지 않으면 마치 ‘난 당신이 가르치는 것을 다 알고 있어’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아이의 태도가 왜 그렇게 냉소적인지 궁금하여 담임선생에게 물었더니 “그 애 아버지가 대입 학원 원장이거든요. 아마 전 과목을 학원에서 개인 지도 받고 있을 거예요” 하고 말하면서, 의대가 목표인 아이라고 덧붙였다.
학원장 아들, 전 과목 개인 지도, 의대가 목표…. 이런 것이 아이의 심드렁한 태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1학기 기말고사 성적 통지가 나오고 나서 며칠 후, 아이들의 입소문을 들었다.
“걔가 전교 2등이래. 근데 걔네 아버지한테 엄청 까였다더라. 1등이 아니고 겨우 2등이 뭐냐고, 헐~.”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그 아이의 맑지 못한 시선을 떠올리면 뜬소문만은 아니었지 싶다.
아이는 그해 입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재수하여 의대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과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
… 부모의 질책을 받으며 일류 대학을 가고, 남 보기에 좋은 직업을 가지면 행복해질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도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없는데….
끝없는 상향 욕구에 시달리며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결핍의 욕구를 내 아이가 대신 채워주기를 기대하며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_13 나는 어떤 부모일까?
부모가 조롱하는 말투를 사용하거나 다른 아이와 비교하여 비난하는 것은 자녀의 의지와 잠재력을 크게 손상시킨다. 더구나 어떤 행동을 지적하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인격 자체를 폄하하는 말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안길 수 있다. ‘너는 못돼먹었다’ ‘너는 능력이 부족하다’ ‘너는 게으르다’ ‘너는 인정머리가 없다’ ‘너는 쌀쌀맞다’ ‘너는 나약하다’ ‘너는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게 없다’ 등 ‘너’를 주어로 한 말은 인격 자체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된다. ‘너의 행동은 나쁜 것이다’와 ‘너는 나쁜 놈이다’는 표면적으로 단어 하나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와 듣는 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크게 다르다.
‘너는 이러저러해서 못 믿겠다’ ‘너는 이러저러하니 앞날이 뻔하다’라고 불신하는 말을 반복하면 정말 그렇게 된다. 말이 씨가 되는 것이다. 반복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면 아이는 ‘나는 부족해, 못난이야’라고 믿게 되고, 아이의 뇌는 부족한 것에 대해서만 인지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때문에 긍정적인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무심하며 자신이 잘한 일에 대해서도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게 된다.
캐나다 맥길대학교의 소니아 루피앵 박사가 발표한 연구는 이 같은 행동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루피앵 박사는 15년에 걸쳐 노인 92명에게 뇌 기능을 테스트한 결과, 기억력 및 학습 능력과 같은 뇌 기능의 수준은 자부심·자존감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이럴 수밖에 없어’라는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부정적으로 발휘되어 뇌 기능 저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며, ‘언제나 무언가를 잃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그것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결코 할 수 없게 된다’고 부연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펠리시어 후퍼트 박사 역시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아 즐길 줄 아는 긍정적인 자세가 중요하다며 루피앵 박사의 발표에 힘을 실어주었다.
_18 자녀를 믿지 않는 부모 2
자녀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이름을 세 명만 대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녀가 친구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에 부모가 도와줄 방법도 마땅한 것이 별로 없다.
부모는 자녀의 또래 관계에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한다. 자녀의 친한 친구는 누구이고, 그 친구의 장단점과 매력은 무엇인지, 관계 맺기에 고민은 없는지 등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자녀의 친구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 애는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에요.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상담 장면에서 부모들로부터 흔히 듣는 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친구 때문에 네가 망가졌다”라고 말한다면, 두 가지 경로로 자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부모가 자녀의 친구를 상호작용의 관계로 인식하는 경우에는 ‘수준 낮은 녀석들끼리 사귀고 있다’는 메시지가 되고, 주종 관계로 오해하는 경우에는 ‘한심하게 줏대도 없이 끌려다니고 있다’는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것은 부모-자녀 사이에 긍정적 스트로크(어루만지기, 쓰다듬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난 한국의 청소년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것은 ‘사랑과 소속의 욕구’이다. 때문에 ‘부모덕에 잘 먹고 잘 큰 줄 알아라’는 빈곤 시대의 논리로는 아이를 부모 곁에 머물게 할 수 없다. …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부모와 친밀하게 지내는 아이를 더 많이 부러워한다. 아울러 공부 잘하는 아이가 부러운 경우에도 ‘부모에게 구박받지 않을 테니까’ ‘부모에게 떳떳할 수 있으니까’ 하는 심리가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아이가 가진 재산 중에 가장 큰 것은 부모라는 존재인데, 그 존재가 자신을 조건 없이 고귀하게 사랑해주기를 아이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_32 내 아이를 바라는 대로 키우는 부모 연습 2
--- 본문 중에서